석유화학업계가 한국의 중후장대 산업을 이끌고 있다. 저유가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중이다. 정부의 구조조정 대상에서도 일단 제외됐다. 하지만 장기적 차원에서는 구조조정과 성장 동력 마련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이대로 둔다면 조선과 중공업, 철강업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유화업계 현실을 짚어보고 건강한 구조조정의 방향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연초부터 정부는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중후장대 산업을 구조조정의 도마에 올렸다.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중국 등 신흥국이 생산설비를 늘리며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서 국내 업체들은 갈수록 경쟁력을 잃어갔다.
정부는 지난 3월, 조선과 해운업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 구조조정 추진현황 및 향후계획’을 발표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유가하락 등에 따른 제조원가 하락으로 마진이 상승하고, 해외 경쟁사들의 설비증설 지연으로 수익성이 개선돼 당장 구조조정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지난해부터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에틸렌을 중심으로 제품 스프레드(판매가-원료가)가 견조하다. 하지만 이런 양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짧은 호황, 긴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 그래픽: 김용민 기자/kym5380@ |
◇ 아직은 괜찮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나프타를 원료로 만드는 올레핀 계열(에틸렌·프로필렌) 제품 및 아로마틱 계열 중 파라자일렌(PX)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다.
11일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에틸렌 생산규모는 연산 850만톤, 프로필렌은 705만1000톤 규모다. PX는 103만톤 생산이 가능한 수준이다. 에틸렌과 프로필렌은 기초 유분, PX는 중간원료여서 이들을 원료로 생산하는 다운스트림 제품 역시 에틸렌과 프로필렌, PX 시황과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지난해부터 이들 제품은 국제유가의 하향 안정화와 이에 따른 제품 수요 증가에 힘입어 가격이 급등하고, 스프레드도 꾸준히 확대됐다. 7월1주 기준 에틸렌 스프레드는 톤 당 677달러, 프로필렌은 333달러 수준이다. 에틸렌의 경우, 연초 이후 스프레드가 가장 낮았던 시점과 비교하면 톤 당 스프레드가 33달러 가량 올랐다.
▲ 자료: 한국석유화학협회 |
오는 8~9월 아시아 지역 내 정기보수가 예정돼 있고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이 공장 가동을 제한해, 공급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설비의 가동 중단, 재고확보 수요 증가 등도 수급 상황을 더욱 타이트하게 만들었다.
PX 스프레드 역시 양호한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주 기준 PX 스프레드는 톤 당 달러 398달러로 연초 대비 약 27달러(72%) 급상승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2분기 및 하반기 실적 전망도 밝다. 금융정보 제공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업계 1위인 LG화학 2분기 영업이익은 5687억원, 2위인 롯데케미칼은 5533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분석된다. 전분기와 비교하면 약 1100억원, 800억원 가량 증가한 수치다.
윤재성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7월 이후 아시아 지역 내 생산설비의 정기보수가 시작되고, 중동 지역의 라마단 종료로 거래가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제품 스프레드에 긍정적 요소”라며 “또 수요가 많은 성수기를 대비해 이달부터 재고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어 당분간 가격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 내년 이후엔?
범용 화학제품은 경기 사이클에 따라 시황이 변한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스프레드 강세는, 국제유가의 하향 안정화와 아시아 지역 내 생산설비 증가속도 저하가 겹쳤기 때문이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의존도가 가장 큰 에틸렌의 경우, 최근 몇 년간 계획됐던 생산설비 준공이 지연된 가운데 늘어난 수요를 공급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내년까지는 지금의 스프레드 강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 자료: 현대증권, IHS |
하지만 중국이 CTO(석탄분해설비)나 MTO(메탄분해설비) 등 나프타보다 싼 원료로 에틸렌을 만들 수 있는 생산설비를 짓기 시작한다면 에틸렌 스프레드는 현 수준을 유지하기 어렵다. 중국은 현재 CTO와 MTO 각 3기를 운영 중이며 2018년에는 CTO 40기와 MTO 20기 등 1700만톤 규모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더해 미국의 셰일혁명을 통해 생산될 에틸렌까지 글로벌 시장에 공급되면 시황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PX도 상황은 마찬가지. 중국 PX 수입량의 46.8%가 한국산이다. 중국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한국인데, 그만큼 한국의 유화산업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다.
지난해 중국 PX 생산능력은 연산 1247만7000톤, 반면 수요는 2023만톤으로 자급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올해도 중국의 PX 수입량은 전년보다 11.6%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현재 PX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로 인해 2020년이면 PX 생산능력이 2140만톤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에틸렌과 PX 등 범용 제품 의존도에서 탈피해야 하는 이유다.
김은진 화학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현재 많은 기업들이 고부가 제품 개발과 제품 다변화를 위한 신규 투자, M&A(인수·합병)를 통한 구조조정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있다”며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지금의 호황에 안주해 투자 시기 등을 놓친다면 다가올 위기를 대응하는데 힘겨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