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흥분된다."
재일교포 3세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지난해 7월18일 영국의 한 반도체회사를 약 240억파운드에 인수하기로 한 뒤 기자들에게 이 같이 '쿨'한 말을 남겼다. 우리돈으로 치면 35조원인데 더 못깎아 아쉽다는 식의 말은 없었다.
더구나 손 회장이 인수한 회사는 공장도 없고 자신의 이름을 단 제품도 만들지 않는 회사다. 이러한 곳을 반도체업계에선 '칩리스(chipless)'라고 부른다. 현대차의 시가총액이 31조원(지난 1일 기준)이니 손 회장이 이 회사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손 회장, 정확히는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곳은 'ARM'이라는 반도체 설계회사다. 많은 이들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애플이 만드는 스마트폰에는 ARM이 설계한 반도체가 들어있다. 특허공룡 퀄컴의 '스냅드래곤'과 엔비디아의 '테그라'에도 ARM의 설계기술이 빠지지 않는다. 전세계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90% 이상이 이 회사가 설계한 칩으로 구동한다.
지난해 ARM의 기술을 활용해 생산된 칩(반도체)은 177억개. ARM은 그 대가로 로열티와 라이센스비를 받아 12억7100만파운드(약 1조8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도에 비해 2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압도적인 시장지배력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손 회장은 비싼 값을 주고도 후회를 몰랐다. 그는 올해 6월 소프트뱅크 주총에서 "내가 인수한 회사 가운데 정말 핵심을 꼽으라면 ARM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천정부지 인수가격…"그래도 후해 안해"
소프트뱅크의 ARM 인수가 발표된 지 3개월 뒤 더 폭탄같은 인수합병이 발표됐다. 통신칩 분야의 강자인 퀄컴이 지난해 10월 네덜란드의 자동차용 반도체기업인 NXP를 인수한 것. 인수금액은 470억달러(약 54조원)로 반도체 인수합병사에서 역대 최대기록을 썼다.
NXP는 필립스에서 떨어져나온 반도체회사다. 차량용과 통신용 반도체 등 주로 비메모리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 NXP는 퀄컴에 인수되기 직전인 2015년 비슷한 업종에 있는 프리스케일을 118억달러(약 14조원)에 인수해 전세계 자동차용 반도체 1위 기업으로 몸집을 불려놨다. 퀄컴은 이런 NXP를 인수해 통신칩뿐 아니라 자동차용 반도체까지 넘보는 발판을 만든 것이다.
이밖에 싱가포르의 아바고가 브로드컴을 370억달러에 인수하고, 인텔이 알테라를 167억달러에 사들이는 등 최근 몇년간 반도체업계는 M&A 전성기였다. IC인사이츠에 따르면 2015년과 2016년 전세계 반도체기업 M&A 규모는 각각 1000억달러 안팎에 달했다.
반도체업계에서 '빅딜'이 빈번한 것은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웨어러블기기 등으로 반도체의 쓰임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과 무관치않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전세계 사물인터넷 시장이 2015년 약 3000억달러에서 2020년에는 1조달러로 연평균 30%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존에는 반도체의 쓰임이 PC, 가전, 스마트폰 등에 집중됐지만 앞으로는 각 가정과 도시, 자동차 등 인간의 삶 전분야로 확대될 것이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 반도체 시장 더 열린다…M&A 뛰어든 거인들
국내 반도체기업들도 강건너 불 구경한 건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조원을 들여 자동차 전자장비와 오디오 분야 전문기업인 미국의 하만을 인수했고 SK하이닉스는 2012년 이후 램드(LAMD)·이노스터·소프텍 등 컨트롤러 전문기업을 하나씩 인수해왔다. SK하이닉스는 현재 매물로 나와있는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에도 뛰어든 상태다.
하지만 대어(大魚)가 나올 때마다 덥석덥석 무는 해외 기업들에 비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M&A 행보는 조심스럽다.
중국의 칭화유니그룹만 해도 2015년 메모리반도체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을 230억달러에 공개매수하겠다고 밝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지만 중국의 반도체 야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M&A로 몸집을 불리는 미국 기업들과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는 중국 기업들 사이에 반도체 강국 한국의 위치가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