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전기차 보조금 폐지와 전기차 캐즘 장기화가 겹치면서 국내 배터리 산업이 다시 구조조정 국면에 들어섰다. 실적 부진이 현실화하자 정부와 업계가 동시에 움직였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배터리 셀 3사와 주요 소재 기업을 긴급 소집해 현황 점검에 나선 것도 이러한 위기 인식이 반영된 행보로 해석된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김 장관은 지난 8일 서울 모처에서 김우섭 LG에너지솔루션 커뮤니케이션센터장, 신창호 SK온 운영총괄, 조한제 삼성SDI 마케팅팀장 부사장과 비공개 조찬 간담회를 가졌다. 당초 최고경영자(CEO) 회동을 추진했으나 일정 조율 과정에서 대리 참석 형태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송호준 에코프로 대표와 허제홍 엘앤에프 대표 등 주요 배터리 소재 기업 경영진도 참석했다. 김 장관 취임 이후 배터리 업계 경영진을 긴급 소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간담회는 최근 국내 배터리 업계 전반에 계약 차질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마련됐다. 참석자들은 미국 전기차 수요 둔화에 대응, 현지 완성차 업체와의 합작법인 구조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서 포드와의 합작법인 블루오벌SK 체제를 정리한 SK온의 사례가 하나의 모델로 거론됐다.
이 같은 위기 인식은 실적 악화에서 비롯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삼성SDI의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2874억원 적자다. SK온 역시 2000억원대 영업손실이 예상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발표한 지난해 4분기 잠정실적에서 영업손실 1220억원을 기록했다. 여기에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금액 3328억원을 제외하면 실질 적자 규모는 4500억원을 웃돈다. K배터리 3사가 모두 다시 적자 국면에 진입한 셈이다.
근본 원인은 미국 정책 변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0월 전기차 구매 시 최대 7500달러를 지원하던 세액공제를 폐지했다. 이후 미국 전기차 판매는 급감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내 전기차 신규 판매량은 전년 대비 40%가량 줄었다.
유럽연합(EU)이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전면 금지 방침을 사실상 철회한 점도 전기차 확산 속도를 둔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CATL과 BYD 등 중국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끌어올리면서 국내 업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지난해 1~10월 기준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점유율 합계는 16.0%로, 전년 동기 대비 3.5%포인트 하락했다.

손익 압박이 커지자 배터리 3사는 올해 사업 중심축을 에너지저장장치(ESS)로 옮기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미시간 공장의 ESS 전환 시점을 1년 앞당겨 지난해부터 조기 양산에 돌입했다. 삼성SDI는 미국에서 2조원대 ESS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고객사 확보에 나섰다. SK온은 미국 합작법인 정리를 통해 고정비 부담을 줄이고 ESS 대응 여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택했다.
업계 내에선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때문에 이번 간담회에서도 한국판 인플레이션감축법 도입 필요성이 재차 언급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생산량에 연동해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국내생산촉진세제를 공약으로 제시했고, 재정경제부는 이를 2026년 경제성장전략에 포함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오는 7월 세제개편안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미국은 배터리 셀과 모듈에 대해 킬로와트시당 최대 45달러 수준의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이를 현금 환급하거나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중국은 설비 투자부터 운영자금까지 전방위 지원에 나서고 있으며 일본도 수조원 규모의 생산 보조금을 배정했다. 반면 한국은 법인세 감면 중심 구조여서 적자를 내는 기업은 정책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사업 구조를 재정비하면서 ESS 등 신규 수요처를 적극 발굴해야 할 시점"이라며 "배터리는 전기차를 넘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인 만큼 재정 지원 방식과 강도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일각선 전기차 캐즘과 정책 변수만으로 현재의 위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하면서도 근원 기술 경쟁력에 대한 확신 없이 정책에만 기대는 구조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업계 전문가는 "캐즘을 강조하는 순간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게 된다"며 "이미 국내 배터리 산업은 물량 경쟁을 넘어 기술 격차가 실적과 점유율을 좌우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이 전문가는 "전고체, 차세대 원통형, 소듐이온 등에서 아직 양산 단계의 경쟁력을 입증한 사례는 없다"며 "수주잔고나 대형 계약이 방패 역할을 하던 국면은 이미 끝났고 실제 납품과 수익으로 이어지는 기술이 없으면 구조적 반등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ESS 역시 전기차 부진을 대체할 해법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평가다. 그는 "중국 업체들이 원가와 생산 규모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시장에서 정책 수요에 기대 버티는 전략은 지속될 수 없다"며 "결국 반등의 조건은 경기나 정책이 아니라 기술이며, 각 기업이 연구·개발 조직을 근본부터 다시 짜지 않는 한 캐즘 이후에도 경쟁력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