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차·SK·LG 등 재계 총수들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총성 없는 전쟁'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수감되면서 끊긴 글로벌 네트워크 복원에 힘을 쏟고,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식으로 각국을 돌며 사업기반 다지기에 한창이다.
올해 6월 총수에 오른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최근 승계를 매듭짓자마자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안정보다 미래 성장에 방점을 둔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 재계 총수들이 새로운 먹거리 발굴에 분주하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
9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7일 오전 방한 중인 사티아 나델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인공지능, 클라우드 컴퓨팅, 데이터 센터, 5세대(5G) 이동통신, 소프트웨어 등 미래 성장산업에 대한 협력 확대를 논의했다.
나델라 CEO는 2014년 취임 후 클라우드 사업을 내세워 위기에 빠진 MS를 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부회장과도 몇차례 만나며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회동을 계기로 삼성전자는 MS에 클라우드 서버용 반도체 공급을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고성능의 반도체가 필수적이다. 삼성전자 제품에도 MS의 클라우드 서비스가 탑재될 전망이다.
지난 2월 초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 부회장이 국내에서 글로벌 기업 CEO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앞으로 그의 경영행보가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것에 맞춰 ▲순환출자 해소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직원 8700명 직접고용 ▲반도체 백혈병 분쟁 해결 등 얽히고 설킨 문제를 하나둘 매듭짓고 있다.
같은 날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싱가포르에서 중국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9월 수석부회장 승진 이후 첫 중국 방문이다.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의 우버'로 불리는 그랩에 2840억원을 투자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곧바로 세계 최대시장인 중국으로 향한 것이다.
이번 중국 출장은 정 부회장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현대·기아차는 올해 3분기 최악에 가까운 실적을 냈다. 중국 시장에서 부진했던 게 상당 부분 영향을 줬다. 지난 9월 현대차의 중국 판매량은 6만2962대로 사드 보복으로 판매량이 뚝 떨어진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서도 14.4% 줄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중국 내 입지확대라는 숙제를 해결해야 하는 셈이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6~7일 일본에서 열린 제20회 세계경영자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격변의 시대를 넘어서는 경영'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로서 역할을 했다. 최 회장의 방문에 맞춰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그와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도시바 지분 인수에 약 4조원을 투자한 SK로선 일본 내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일 밤 베트남에 도착한 최 회장은 다음날 응웬 쑤언 푹 베트남 총리를 만났다. 지난해 11월 이후 두번째 면담이다. 첫번째 면담 이후 SK는 베트남 최대 민간기업 중 하나인 마산그룹의 지주회사 지분 9.5%를 5300억원에 인수하며 베트남 사업확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 회장은 이번 면담에서 응웬 총리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응웬 총리는 "이렇게 매년 만나는 해외기업 총수는 최태원 회장 뿐일 정도로 SK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지난"고 밝혔다.
4대 그룹 중 막내인 구광모 회장은 현재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로부터 사업보고를 받고 있다. 이와 동시에 고(故) 구본무 회장이 보유한 ㈜LG와 LG CNS 지분을 넘겨받아 지위 승계에 이어 지분 승계를 완료했다. 지위 승계가 책임을 떠안는 것이라면 지분 승계는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총수로서 첫 공식행보도 의미심장했다. 취임 후 두달 반만인 지난 9월 LG그룹 연구개발의 심장부인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를 찾아 '투명 플렉시블 올레드' 등 차세대 제품을 둘러보고 인공지능·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을 육성하는 방안을 경영진과 논의했다. 총수가 미래 먹거리를 직접 챙긴다는 이미지를 그룹 안팎에 심어준 것이다.
세대교체도 예상된다. 구 회장은 취임 후 보름여만에 ㈜LG의 대표이사를 하현회 부회장에서 권영수 부회장으로 전격 교체해 그룹내 변화를 예고했다. 1957년생인 권 부회장은 LG그룹 부회장 6명 중 가장 젊다. 재계에선 구 회장이 조직안정보다는 변화를 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이달 말 그룹 인사를 앞두고 그룹내 최장수 최고경영자인 박진수 LG화학 부회장의 은퇴 발표가 나왔다. 박 부회장 자리는 3M의 신학철 수석부회장이 맡는다. LG화학 역사상 최고경영자를 외부에서 영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