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과 2등의 만남.' 삼성전자와 미국 AMD가 이달 초 맺은 그래픽 설계자산(IP) 관련 전략적 파트너십에 대한 업계의 평가다.
삼성전자는 1993년 이래 20년 넘게 메모리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2차례 '반도체 치킨게임(극단적 가격경쟁)'을 거치며 1위 자리가 더 공고해졌다.
다만 미국 AMD는 비메모리 부문 만년 2위다. 주력 제품인 중앙처리장치(CPU)는 인텔에,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는 엔비디아에 밀린다. 이 회사는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로부터 2015년 '투자부적격' 등급을 받았다가 최근에야 기사회생하고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삼성전자와 AMD. 하지만 양사는 수십년전 이미 직·간접적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두 회사의 이 협력은 두 회사와 공통분모를 지닌 CPU 등 비메모리 강자 인텔로 이어진다.
◇ 아쉬운 그 이름 '알파칩'
"메모리 반도체가 거꾸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비메모리를 일으켜야 한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2007년 집필한 '열정을 경영하라'에 나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어록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세운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1위 등극' 계획은 그만큼 뿌리가 깊다.(※관련기사 : 이재용이 그린 133兆짜리 '빅픽처')
삼성전자는 이전부터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메모리 반도체는 D램, 낸드플래시 등 종류가 단순해 경기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이미지센서, CPU, GPU 등 다양한 분야로 분산되는 만큼 상대적으로 경기에 덜 민감하다.
삼성전자가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비메모리 반도체의 꽃'이라 불리는 CPU였다. 삼성전자가 그간 업력을 쌓은 메모리 반도체와 시너지를 쌓고, 경기 변동에 따른 실적부침을 줄일 수 있는 카드였다.
'수위 경쟁' 인텔 견제에 사업 물거품 돼
삼성전자는 CPU 사업진출의 길을 합작에서 찾았다. 미국 DEC사와 손을 잡고 1997년부터 '알파칩' 생산에 나섰다. DEC사가 설계기술을 제공하고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알파칩은 CPU중 가장 빠른 처리속도를 자랑했다.
삼성전자와 DEC는 이듬해엔 API라는 합작회사를 지분 75대 25 비율로 설립했다.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육성 꿈이 멀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알파칩이 차세대 윈도우 운영체제인 '윈도우 NT'와 호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운영체제 시장을 독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를 지원하지 못하는 알파칩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DEC사가 재정악화로 알파칩용 윈도우 NT 개발지원을 포기한 결과였다. 결국 DEC는 1998년 개인용 컴퓨터(PC) 제조업체 컴팩에 인수된다.
인텔은 여기에 더해 알파칩에 비수를 날렸다. 컴팩의 알파칩 사업부를 2001년 통째로 인수한다. 알파칩의 싹을 자르기 위한 견제구였다는 평가다. 인텔은 앞서 DEC가 컴팩에 인수되기 전부터 특허소송을 제기하며 알파칩을 견제했다.
당시 컴퓨터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인텔의 CPU가 사실상 독점해 둘을 합쳐 '윈텔 진영'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슈퍼 컴퓨터 등에 쓰이며 성능이 우수했던 알파칩이 나중에라도 자사 CPU 대항마로 떠오르는 것을 인텔이 원하지 않았다.
인텔이 설계자산 등 알파칩 원천기술 손에 넣자 삼성전자도 손을 들었다. API사 매각을 결정한 것이다. 진 전 대표이사가 "수많은 반도체기술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이라 묘사한 알파칩은 수중으로 가라 앉았다.
◇ AMD와 협력 '신의 한수' 될까?
흥미로운 점은 AMD가 2001년 이 API사를 인수한 것이다. 2008년부터 2년여간 회사를 이끈 더크 마이어 AMD 최고경영자는 DEC에서 수십년간 알파칩 설계를 담당한 전력이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AMD의 이번 동행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이래 첫 협력사업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구체적으로 업체명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넓게 보면 비메모리 반도체 1위 인텔이 목표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인텔과 반도체 분야에서 선두다툼을 이어오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연간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거둔 매출이 785억달러로 인텔(699억달러)을 2년 연속 제쳤다. 1993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진 인텔 독주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만 올해 전망은 좋지 않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부터 2분기 연속 인텔에 매출 순위에서 밀렸다.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인한 메모리 반도체 수요 둔화 등이 원인이다. 올해 예상 매출액은 631억달러로 인텔(706억달러)에 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2년 만에 '세계 반도체 1위'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란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협력은 '비메모리 경쟁력 강화'란 꿈을 이룰 카드가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총 133조원을 투자해 비메모리 1위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상태다.
지난 1일 경기도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경영점검회의에서 이재용 부회장도 "삼성이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기술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사장단에 적극적인 투자를 당부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휴대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GPU 성능을 높일 묘수를 그래픽카드 제조사 AMD로부터 전수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가 엑시노스 GPU를 만들 때 IP를 얻어 쓰는 영국 ARM사의 기술은 경쟁사 퀄컴보다 뒤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전자가 2016년부터 자체 개발하는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모바일용 GPU 개발도 힘을 얻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강인엽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장 사장은 "AMD와 함께 새로운 차원의 컴퓨팅 환경을 선도할 모바일 그래픽 기술의 혁신을 가속화하겠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와 AMD의 파트너십이 IP뿐 아니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AMD는 그간 글로벌파운드리와 TSMC 등에 반도체 위탁생산을 맡겼다. 그러나 글로벌파운드리가 지난해 7나노 공정개발 포기를 선언해 7나노 물량 대부분을 TSMC가 가져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극자외선(EUV) 기반의 7나노 공정 제품을 양산 중이며, 최근에는 5나노 공정개발에도 성공했다. 파운드리시장의 절반을 점유한 TSMC와 겨룰 유일한 회사로 꼽힌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GPU는 AMD, NVIDIA 등이 독과점한 시장으로 이 회사들이 보유한 설계자산 등 원천기술을 피해 제품을 만들긴 어렵다"며 "해당 기술을 활용해 스마트폰외 다른 분야 제품생산에 쓰일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