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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20대]정주영, 실수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 2019.11.27(수) 13:37

4번의 가출…몸으로 느낀 '노동의 가치'
최대의 자본은 '신뢰'

정주영은 네번의 가출을 시도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했고 지금의 현대를 일궜다. 사진 왼쪽은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일하던 당시의 정주영이다.

"스스로를 자본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를 생산해내는 사람일 뿐입니다." -1982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명예경영학 박사학위 취득 기념 만찬에서

정주영은 '재벌'이라는 표현을 싫어했다. 부둣가 막노동과 건설현장 돌나르기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던 그의 삶에서 재벌이라는 표현을 노동의 의미를 거세한 단어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정주영은 자신의 회고록 <이땅에 태어나서>에 이런 얘기를 남겼다.

"작업을 몰아칠 때는 혼이 나가도록 무섭게 몰아쳤지만 기회 있을 때마다 수많은 기능공들과 한데 어울려 허물없이 술잔도 나누고 팔씨름도 나누면서 육체적으로 고달픈 그들의 휴식에 동참하고는 했다. (중략) 나는 그들의 단순함과 우직함을 좋아하고 또 그 순수함을 신뢰하며 그들의 발전을 원한다."

정주영도 여느 재벌 총수처럼 노동조합을 내켜하진 않았다. 1987년 8월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에는 "외부세력 개입 탓"이라며 대화를 거부해 노조원들에게 감금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를 키워온 현장 노동자에게는 유대감을 나타냈다.

1990년 1월초 열린 현대중공업 노무관리회의에선 노조를 바라보는 정주영의 시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저는 어떤 딴 회사마냥 조합이 있는 건 안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조합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로자들의 고충은 근로자들만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중역들이 근로자들을 잘 살펴준다고 해도 그 세밀한 고충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어요."<아산리더십연구원, 영상·연설자료실>

정주영이 신고 다닌 구두. 닳지 않도록 징을 박고 굽을 갈아 30년을 신었다./출처=아산사회복지재단

정주영에게 직원들은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었다. 6남2녀 중 장남으로 식구들을 챙겨야했던 그에게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구분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다. 먹고사는 문제, 곧 생존이 화두였고 이를 해결할 최고의 무기는 근면과 절약이었다.

겨울에는 사람 키만큼이나 눈이 쌓이는 강원도 통천에서 자란 정주영은 가출소년이었다. 10대 시절 네번이나 집을 뛰쳐나갔다.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죽도록 일해도 배불리 밥 한번 못먹는 농부로,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가 늙어죽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첫 가출에선 원산 부근 철도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아버지에게 붙잡혔고, 소 판 돈을 훔쳐 달아난 세번째 가출에선 서울까지 나왔다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혔다. 그는 "나를 기어이 고향에 붙잡아두려 하셨던 아버님의 집념도 참 대단했지만, 기어이 고향에서 탈출하고야 말겠다던 나의 집념도 예사는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우리나이로 열아홉살이던 1933년 봄, 마지막 가출을 감행했다.

서울로 함께 온 친구에게 여비 50전을 빌려 무작정 인천으로 갔다. 하역작업부터 이삿짐 나르기까지 죽을 둥 살 둥 일을 해도 입에 풀칠밖에 못했다고 한다. 체념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부천 농가에서 품앗이 일꾼으로 한달을 일해 처음으로 약간의 돈을 모아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서울행…. 막노동과 공장 심부꾼을 하면서 틈만 나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요즘으로 치면 '알바' 생활을 전전한 것과 비슷하다.

네번의 가출…소 판 돈까지
막노동·심부름꾼 등 무일푼으로
가게 주인의 제안…쌀가게 시작

이듬해(1934년) 쌀가게 '복흥상회(훗날 정주영이 인수해 '경일상회'로 바꿈)' 배달원으로 취직하자 그 때서야 '고향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안정적인 일자리인데다 점심 저녁 밥을 주고 월급이 쌀 한가마니였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었던 정주영에게 쌀은 목숨이나 진배없었다.

첫새벽에 나가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까지 뿌리며 꾀부리지 않고 일했다. 그를 기특하게 본 가게주인은 가산을 탕진하는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정주영에게 넘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정주영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의를 받았다"고 했다. 가게를 넘겨받아 경일상회로 간판을 걸고 첫 사업을 시작했다. 1938년 1월 그의 나이 스물넷의 일이다.

◆정주영의 '빈대론'

정주영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며 직원들을 혼내고는 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가 인천에서 막노동을 할 때 합숙소에 빈대가 들끓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밥상 위에서 잠을 잤는데 빈대가 밥상 다리를 타고 올라와 물었다. 이번엔 물을 담은 양재기에 상다리를 담가놓고 잤다. 하루 이틀 지났을까. 빈대가 다시 괴롭혔다. 불을 켜고 보니 빈대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사람 몸에 툭툭 떨어졌다.

정주영은 "그때 느꼈던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빈대도 목적을 위해서는 저토록 머리를 쓰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무엇하랴.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 실수했다고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어떤 실수보다 치명적인 실수는 일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남들은 내가 부자라고 부러워도 하고 질투도 하지만 실상 나자신은 부자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며 산다. '내 재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쌀가게를 할 때까지였다. 차츰 일을 키우면서, 기업이 성장하면서는 일이 좋아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나갔을 뿐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나 대한민국에서 첫째가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의식은 진실로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땅에 태어나서>

정주영의 쌀가게는 꽤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일제가 전시군량 확보를 위해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경일상회도 문을 닫았지만,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아버지에게 논 2000평을 사드렸다.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1940년)이다. 그간 모아둔 돈과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으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는데 20여일만에 그만 불이 났다. 잘나가던 쌀가게를 접은 게 엊그제 같은데 새로 시작한 수리공장까지 잃으면서 낭떠러지에 몰렸다. 워낙 무일푼이라 그랬을까. 이 때 정주영식 반전이 두드러진다.

정주영은 1952년 겨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부산 유엔군 묘지 방한을 앞두고 보리밭을 떠다가 푸르게 덮어 미군의 신임을 사고, 1970년 런던으로 날아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들이대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도입을 이끌어내는 등 소설 같은 일화를 썼다. 1998년 소떼 방북이라는 이벤트로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것 역시 정주영이 그려낸 드라마다.

20여일만에 불탄 車수리공장
신용 쌓아 이룬 '극전 반전'
"학식으로 능력 평가해선 안돼"

수리공장이 불에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를 찾아가 "이대로 꺾이면 먼저 빌려간 영감님 돈 3000원도 갚을 길이 없다"며 돈을 더 꿔달라고 요구했다. 담보도 없었다. 좋게 말해 당돌하고, 안좋게 보면 적반하장식 태도에 노발대발할 만하지만 사채업자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정미소를 하면서 돈놀이를 했는데 외상쌀을 가져간 정주영이 꼬박꼬박 빚을 갚아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모양이다.

"날더러 쓰라는 거예요. 5000원 쓰라고 그래요. 내 이름 쓰고 도장 가져 왔냐고 해서 불타고 없다니까 그럼 지장을 찍으라고 해요. 그러면서 이 돈을 왜 꿔주냐 하니 돈을 한 푼도 떼인 일이 없다는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 꿔준다고. 그러니까 꼭 벌어 갚아야 한다고 얘길 했어요."<아산리더십연구원, 영상·연설자료실>

정주영은 숨지 않고 정면돌파를 택했고 사채업자는 그의 신용을 높이 샀다. 정주영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착실하다, 성실하다, 정직하다는 신뢰만 얻으면 그것을 자본으로 자신의 생애를 얼마든지 확대,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나는 장사도 기업도 돈이 있으면 더욱 좋고, 돈이 없어도 신용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안 사람이다. (중략) 개인으로서 쌓은 신용이 작은 사업을 시작하게 하고, 작은 사업으로 다진 신용이 보다 큰 사업으로 발전해 나가게 하고,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대기업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켜주는 것이다."

현대자동차공업사 시절, 직원들과 금강산 구룡연에 오른 정주영./출처=아산사회복지재단

정주영은 서당 3년과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농사일은 손에 익었지만 전문기술을 배우진 못했다. 그의 지식은 주로 현장에서 나왔다. 20대 시절 낮에는 수금하고 밤에는 차를 직접 고치며 익힌 경험이 훗날 현대자동차 설립의 밑거름이 되는 식이다. 학벌을 중시하고 그 앞에서 좌절하는 지금 같은 사회라면 정주영이라는 인물은 나오기 어렵지 않았을까.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인간이 가진 자질과 능력에 대한 평가를 학교에서 배운 학식의 부피나 깊이만으로 내린다는 것은 크나큰 오류다. (중략) 나는 상식에 얽매인 고정관념의 테두리 속에 갇힌 사람으로부터는 아무런 창의력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믿는 것은 '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를 가졌을 때 발휘되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과 창의성, 그리고 뜻을 모았을 때 분출되는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뿐이다."<이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약력
1915년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출생
1924년 송전소학교 입학
1931년 첫 가출. 원산의 고원 철도공사현장에서 일함. 그 뒤 두번째 가출.
1932년 세번째 가출해 경성실천부기학원 등록
1933년 네번째 가출. 인천부두 등에서 막노동
1934년 쌀가게 '복흥상회' 취업
1938년 복흥상회 인수해 경일상회 시작
1940년 서울 아현동에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
1946년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년 현대토건사 설립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
1953년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 착공. 물가폭등으로 완공 당시 막대한 적자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
1964년 단양시멘트 공장 준공
1967년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1970년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 설립
1975년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 설립
1976년 아세아상선주식회사(현 현대상선) 설립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 24회 올림픽 개최지 서울 확정
1984년 서산간척지 물막이 공사에 이른바 '정주영 공법' 적용
1989년 북한 방문해 금강산 공동개발 의정서 제시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후 낙선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 이른바 '형제의 난'
2001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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