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A씨는 365일 안약을 넣어야 한다. 안압이 높아지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면 추가로 안약을 처방받는다. 안약마다 용량이나 간격 등 투약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정작 점자표기가 있는 안약은 찾기 힘들다. A씨는 고무줄이나 스티커를 이용해 약을 구분하고 있다. 이마저도 보호자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시각장애인 B씨는 최근 심한 두통을 겪었지만, 미리 구비해둔 약을 먹지 못했다. 수많은 약 중 진통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B씨는 "점자표기가 있는 의약품이 늘고 있지만 돌출된 점자 높이가 너무 낮거나 점자의 간격이 달라 읽기 어려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오는 2024년 7월부터 안전상비의약품에는 반드시 '점자'를 표기해야 한다. 지난 6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다. 하지만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를 위한 보건당국의 접근은 여전히 더디다. 개정안이 안전상비의약품에 한정된 데다, 점자표기의 규격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의약품 점자 표기를 위해 전문 인력과 포장지 교체 등 추가 비용이 드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의약품 정보 접근성은 매우 낮다. 26일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점자표기를 포함한 의약품은 94개, 참여 제약사는 17곳이다. 점자 표시가 된 94개 품목 중 42개가 부광약품 제품이다. 나머지 제약사의 점자표기 의약품도 대부분 전문의약품(ETC)에 한정돼있다.
다행인 것은 느리지만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29일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를 통과했다. 안전상비의약품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정한 의약품의 안전정보를 점자와 음성·수어 변환용 코드로 반드시 표기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안전상비의약품은 가벼운 증상에 사용하는 일반의약품(OTC)이다. 편의점이나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다.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파스류 등이 포함된다. 개정안은 오는 2024년 7월부터 시행된다.
그럼에도 국내 보건당국의 의약품 점자표기 진행 상황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많다. 개정안이 안전상비의약품에 한정돼있어서다. 장애인의 보건의료서비스 접근성은 법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당연한 권리다. 그런만큼 의약품 점자표기가 OTC와 ETC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표준화된 점자표기 기준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점자표기는 점자의 크기와 높이, 간격이 중요하다. 점자의 돌출 높이가 너무 낮거나 점간 간격이 넓으면 시각장애인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어렵다. 실제로 국내 점자표기 의약품 중에도 점자 크기가 너무 작거나 돌출 높이가 낮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는 제약사도 있다. 동화약품은 지난 2006년부터 '후시딘' 등 일반의약품에 점자표기를 시행해왔다. 이후 "점자가 잘 안 읽힌다"는 피드백을 받은 뒤부터는 식약처와 맹인협회의 도움을 받아 점자표기 검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점자표기 제품을 꾸준히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업계에서는 의약품 점자표기의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의약품 포장지에 점자표기를 추가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생산공정을 바꿔야 한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점자표기를 위해서는 의약품 한 개당 3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특히 포장지 교체 등에 따른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의약품 가격이 상승해 소비자 부담이 가중될 수도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장애인도 소비자로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하는 만큼 의약품 점자표기는 중요하다"며 "하지만 법으로 강제하기 이전에 관련 기관들이 협의를 거쳐 공감대를 형성하고 정부의 지원책이나 혜택을 통해 참여기업을 늘리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