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도 전 세계적 경기 침체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산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중국의 무역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끝을 알 수 없는 대내외 악재도 위기감을 더한다. 기업들은 생산과 투자를 줄이는 등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며 방어막을 쌓고 있다. 반도체·배터리·스마트폰 등 각 산업 분야의 내년 성적표를 전망해본다.[편집자]
2020년부터 고성장세를 이어왔던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분위기가 뒤집혔다. 엔데믹 이후 소비심리 위축으로 스마트폰, PC, 서버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공급과잉 상태가 지속돼 업체별 재고가 무섭게 쌓이고 있다.
반도체 업체들은 웨이퍼 투입을 줄여 생산량을 조절하는 '자연 감산'을 넘어 설비 가동을 중단하는 '인위적 감산'까지 나선 상황이다. 심지어 내년에는 불황의 그림자가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에도 드리워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내년 반도체 '역성장' 우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내년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이 5960억달러(약 777조원)로 올해보다 3.6%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올 3분기 당시 예측한 성장률보다 하향 조정된 수치다. 가트너는 올 3분기때 내년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이 2.5% 역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산업연구원도 최근 '2023년 경제산업전망'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은 2020년 말부터 지난 7월까지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최근 몇 달간 성장세가 크게 둔화했다"며 "코로나 팬데믹의 특수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이지만 향후 전망도 불투명하다"고 내다봤다.
AI(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 첨단산업 발달로 인해 반도체 수요는 지속 증가하겠지만, 글로벌 경기 둔화로 인한 산업 위축으로 수요 회복을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가 부진하면서 수출전선에도 비상등이 커졌다. 이달 10일까지 반도체 수출액은 1년 전보다 27.6% 감소했다. 반도체 수출은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감소세다.
내년 전망 역시 밝지 않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의 내년 수출은 9.9% 감소할 전망이다. 반도체 수출은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전년 동기 대비 20.8%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8월부터 PC, 모바일 제품의 소비가 줄면서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결국 올해는 전년 대비 1.6% 증가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주력인 메모리반도체 어쩌나
타격이 가장 큰 것은 국내 기업의 주력 분야인 메모리 반도체다. 가트너에 따르면 내년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의 매출은 올해 대비 16.2% 감소할 전망이다.
그중에서도 D램은 공급 과잉 상태가 내년 3분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가트너는 올해 전 세계 D램 매출이 전년 대비 2.6% 감소한 905억달러를 기록하고, 내년에는 742억달러로 18% 더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낸드의 경우 올 3분기 발생한 재고 초과 상황이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올해 전 세계 낸드 매출은 전년 대비 4.4% 증가한 688억달러를 기록하겠지만, 내년에는 13.7% 감소한 594억달러를 기록할 전망이다.
위기 극복 위한 이례적 '감축' 선택
수요 감소로 가격이 내려가고 재고가 쌓이자 반도체 업체들은 투자 축소와 함께 생산량 감축이라는 대응책을 내놨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업체는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투자 속도 조절, 공정 전환 등을 통해 자연적인 감산을 진행한다. 직접적으로 생산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감산 효과를 줄 수 있는 여러 방식을 동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D램의 경우 생산공정이 업그레이드 될수록 웨이퍼 한 장에서 만들어내는 반도체 칩 수가 늘어난다. 미세공정으로 전환할수록 웨이퍼 투입량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올해는 여기에 인위적 감산까지 더할 계획이다. 특히 올 3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한 SK하이닉스는 내년 메모리 설비 투자를 올해 절반 이상 줄이는 한편, 내년에는 수익성이 낮은 제품을 중심으로 생산을 줄이는 등 강력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과 일본 낸드플래시 기업인 키옥시아도 최근 생산량을 30~50% 하향 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는 "인위적 감산은 없다"고 선언했으나, 업계에서는 생산라인 효율화를 통해 자연 감산을 유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믿었던 파운드리 '너마저'
반도체 업황 둔화의 영향이 적었던 파운드리 시장도 내년에는 한파가 예상된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3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상위 10개 기업의 매출은 전 분기 대비 6% 증가한 352억1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다만 경기 침체와 높은 인플레이션 등이 지속되며 하반기 수요가 부진해 재고 소진이 더뎌 4분기부터는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는 게 트렌드포스 측 전망이다.
트렌드포스는 "가전 시장의 슬럼프가 계속되면서 소비자 가전에 사용되는 칩에 대한 파운드리 주문이 하향 조정돼 결국 파운드리 웨이퍼 출하량과 가동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상위 10개 파운드리 기업 대부분이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거나 수익이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파운드리 시장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선방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다만 파운드리 분야 시장 2위인 삼성전자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1위인 대만 TSMC와의 격차를 쉽사리 좁히고 있지 못하고 있어서다.
트렌드포스 조사 결과 지난 3분기 파운드리 상위 5개 업체 중 삼성전자 홀로 역성장(-0.1%)했다. 점유율도 전 분기 16.4%에서 15.5%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TSMC의 매출은 전 분기 대비 11.1% 증가하며 점유율을 56.1%까지 높였다. 삼성전자와의 격차는 37%p(포인트)에서 40.6%p까지 더 벌어졌다.
언제쯤 살아날까
업계에서는 내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업황이 살아날 것으로 보고 있다. 투자 축소와 감산 효과로 수요가 다시 늘어나면서 가격도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내년 반도체 시장은 올해 대비 약 6% 감소하겠지만, 이미 반도체 부분별로 재고 조정이 진행 중이고 투자 축소까지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년 하반기 이후에는 사이클 변곡점이 나타날 가능성이 유효하다"며 "오는 2024년 이후 반도체 시장은 다시 성장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향후 예정된 1년여간의 혹한기에도 기술 개발의 끈을 놓지 않을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높은 단계의 기술을 적용한 고부가가치 제품은 장기적으로 매출 수익성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며 "공정 전환을 통해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위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술 개발을 놓을 수 없다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