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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특례제도 '허점' 속 길 잃은 K바이오

  • 2023.04.04(화) 11:38

산업 특성 반영 못한 규정, 기업 성장 방해
생태계 훼손 우려에도 상장폐지 기준 완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증시 상장 제도가 있습니다. 특례상장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유가증권시장이나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기 위해서는 외형이나 실적 등 특정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와 달리 특례상장 제도를 활용하면 자기자본 규모가 작거나 수익성이 부족한 기업도 코스닥 시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기술평가특례나 성장성 추천 제도로 상장한 기업(기술성장 기업)은 상장 후 일정 기간 재무 관련 관리종목 지정 요건도 면제됩니다. 유망한 기업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투자자에게는 자산 증식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금융당국이 나서서 기업의 상장 문턱을 낮춘 만큼 금융당국은 투자자 보호라는 과제도 떠안게 됐습니다. 자율의 원리에 따르는 기존 시장보다 금융당국의 관리감독 기능이 커진 것이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이오 기업이 기술성장 기업의 80%에 달할 정도로 특례상장 제도는 바이오 기업의 전유물로 여겨져왔습니다. 제도 도입 18년이 지난 현재 바이오 업계에서는 특례상장 제도가 오히려 바이오산업 생태계를 무너뜨렸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일부 규정이 기업의 성장과 시장의 자정작용을 방해했고 결과적으로 투자자도 피해를 봤다는 지적입니다.

우선 바이오 기업들은 특례상장 제도의 일부 규정이 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토로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에 맞추느라 기업이 경영 전략이나 사업의 방향을 바꾸는 상황도 생긴다고 하고요. 기술성평가가 대표적입니다. 기술평가특례로 상장하려면 한국거래소가 지정한 전문 기관 중 두 곳에서 각각 A등급과 BBB등급 이상의 평가 등급을 획득해야 합니다. 목적은 상장에 앞서 탄탄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을 걸러내 투자자를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상장을 해야 하는 바이오 기업 입장에서는 신약 개발 성공보다 기술성평가 통과가 중요해집니다. 기술성평가 잣대에 맞춰 임상 파이프라인 개수를 조정하거나 무리하게 기술이전을 추진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기술성평가가 요구하는 후기 임상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임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기존 전략을 포기한 기업도 있고요. 기술이전 성과를 내기 위해 바이오 기업이 자회사를 만든 뒤 기술을 이전하는 꼼수도 종종 보입니다.

최근 기술평가특례로 코스닥에 입성한 한 신약 개발 바이오텍의 사례를 볼까요. 해당 기업은 비상장 단계에서 인정받았던 기업가치의 절반 수준으로 몸값이 떨어졌지만 상장을 강행했습니다. 유동성이 풍부해 당장 상장이 급한 게 아닌데 굳이 이 시기에 상장하는 이유를 묻자 기업 대표는 기술성평가를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기술성평가를 해보니 회사의 모든 인력이 여기에만 쏠려 나머지 사업을 진행할 수가 없다. 두 번은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반토막 난 기업가치를 감내하더라도 기술성평가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상장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재무 관련 상장 유지 요건도 산업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성장 기업은 상장 후 일정 기간 관리종목 지정 유예 혜택을 받지만 그 이후부터는 매출을 내야 합니다. 이 역시 투자자가 부실기업에 투자해 피해를 보는 걸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유예 기간이 충분치 않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 1조~2조원, 기간은 10년 이상입니다.

특히 애매한 상장 유지 요건으로 인해 바이오 기업이 신약 개발과 무관한 사업에 나서도록 내몰렸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 특례상장 유예 기간 만료에 다다른 다수 바이오 기업이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등을 통해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바이오 기업의 신사업 진출을 부정적으로만 보긴 어렵습니다. 바이오 기업이 수익원 없이 10년을 버티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신사업에서 안정적인 현금창출원(캐시카우)을 확보하고 이를 신약 개발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죠.

그러나 기업이 상장 유지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사업을 추진하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신약 개발에 온전히 쏟아도 모자랄 에너지가 분산될 수 있습니다. 성장성특례 1호 기업 셀리버리가 최근 감사의견거절로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한 주요 원인이 상장 유지 요건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진행한 신사업 때문이었다는 게 업계의 판단입니다. 결국 산업 육성과 투자자 보호 모두 실패한 셈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특례상장 제도로 상장 문턱은 지나치게 낮아진 반면 시장 퇴출은 경직됐다는 점입니다. 현재 제도에서는 상장 유지 요건만 갖추면 기술성장 기업이 상장폐지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껏 특례상장 제도로 100곳 이상의 바이오 기업이 코스닥 시장에 진입했지만 이들 기업 중 상장폐지된 기업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미 경쟁력을 잃었지만 '상장사'라는 이유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받아 연명하는 기업도 많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국내 바이오산업 전반에 대한 신뢰도도 낮아졌고요.

업계에 따르면 미국의 상장 바이오텍 수가 400여 곳인데 국내 상장 바이오텍 수가 150여 곳이라고 합니다. 국내 제약 시장 규모가 미국 시장의 10%가 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상장한 바이오 기업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할 수 있겠죠. 참고로 기업공개(IPO)나 상장폐지를 시장의 판단에 맡기는 미국의 경우 시장 퇴출 기준이 명확합니다. 나스닥에서는 주가가 1달러 미만으로 30거래일 연속 거래되면 경고 조치를 받습니다. 이후 90일 내 주가가 열흘 연속 1달러를 넘지 못하면 상장폐지됩니다. 당연히 기술성평가나 상장 유지 요건도 없습니다.

특례상장 제도는 국내 바이오산업의 성장 마중물 역할을 해왔습니다. 바이오 기업의 코스닥 시장 진입 기회를 높여 산업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특례상장 제도가 산업 발전과 투자자 보호에 도움이 될지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제도의 허점이 바이오산업 생태계를 훼손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이 가운데 거래소는 기술성평가 기준은 높이고 상장폐지 요건을 완화했습니다. 투자자를 보호하면서 산업의 성장도 이끌겠다는 당초 취지와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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