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기관명을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바꾸고 재계 맏형으로서의 위상 되찾기에 나섰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제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미국통으로 알려진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공식 선임했다. 특히 지난 수년간 탈퇴했던 4대 그룹도 회원사로 복귀시켰다.
한경협은 정경유착 고리를 끊기 위해 '윤리위원회' 설치 등 혁신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여전히 정경유착 고리를 끊어내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 나온다. 이번에 복귀를 선언한 삼성그룹 계열사 중에서도 삼성증권은 '정경유착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라 복귀를 보류했다.
류진 회장의 무게감
전경련은 2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어, 기관명을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바꾸고 새 회장에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선임했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K스포츠와 미르재단을 위한 기업 후원금 모금을 주도한 사실이 드러나며 정경유착의 고리로 지목됐다. 이를 계기로 전경련은 민심과 위상을 잃었고 4대그룹도 전경련에서 탈퇴해, 국내 최대 민간 경제단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한경협은 1961년 설립 당시 사용했던 명칭을 다시 사용하며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환골탈태하겠다는 의지다. 중추 역할은 '미국통'으로 불리는 류진 회장이 맡았다. 류 회장은 4대그룹 총수들뿐 아니라 미국 정·재계와도 친분이 있다는 평가다.
류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G7 대열에 당당히 올라선 대한민국,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며 "이 길을 개척해 나가는 데 한국경제인협회가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한경협은 정경유착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내부통제시스템인 윤리위원회 설치를 정관에 명시했다. 윤리위원회 구성과 운영사항 등 시행세칙 마련은 추후 확정된다.
류 회장은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잘못된 고리는 끊어내 신뢰받는 중추 경제단체로 거듭나기 위한 첫걸음으로 윤리위원회를 신설한다"며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분을 위원장과 위원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류 회장은 임시총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선 "윤리위원장은 이미 선임된 상태이지만 5명 위원까지 확정되면 공개하겠다"며 "발표했을 때 (국민들이)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일정금액 이상 기금은 모두 윤리위원회(승인 또는 동의)를 통하려 한다"며 "윤리위원회에서 반대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4대그룹 귀환과 우려시각
한경협에는 삼성, LG, SK, 현대차 등 4대그룹도 복귀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4대그룹이 탈퇴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것이다.
전경련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소(한경연)를 통합, 한경협으로 거듭난다.
4대그룹은 과거 전경련 회원사에선 탈퇴했지만 한경연 회원사 자격은 유지했는데, 이번에 전경련-한경연 통합이 이뤄지면서 탈퇴의사를 표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한경협 회원자격이 유지되는 모양새였다.
4대그룹이 법적으로 한경협 회원이 되는 시점은 전경련-한경연 통합 정관개정에 대한 주무부처 승인이 이뤄질 오는 9월로 예상된다.
이같은 우회적 합류 방식을 두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시민단체는 '꼼수'라고 비판한다. 4대 그룹의 전경련 합류 여부를 두고 정경유착의 우려가 깊은 만큼, 기업이 직접적으로 재가입하는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는 전경련의 고육지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특히 류 회장은 이재용 삼성 회장과 혼맥으로 얽혀 있다. 이 회장의 이모인 홍라영 전 리움 부관장이 류 회장 아내인 노혜경 씨의 오빠(노철수 애미커스그룹 회장)와 결혼했다. 때문에 이 같은 관계가 삼성의 한경협 재가입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해 류 회장은 "다들 꼼수라고 얘기하는데 그보다는 전경련의 필요에 의해 한경연과 합병했고, 4대 그룹은 한경연의 회원사니까 그런 기회가 만들어지면서 자연 해소된 것이지, 억지로 만든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혼맥 관계가 있다는 건 더 부담이 될 뿐이고, 인간 이재용을 더 좋아한다"며 "(이번 삼성그룹의 전경련 재합류에 있어) 혼맥 관계는 전혀 영향주지 않았다"며 답했다.
"이번은 예외?" 정경유착 이미지 개선 중요
전경련이 정격유착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다는 비판 목소리는 여전하다. 정치권과 관계 깊은 인물들의 잔류 또는 진입가능성 때문이다.
지난 3월부터 6개월간 한시적으로 업무를 수행한 김병준 전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이 대표적이다. 그는 류 회장 취임 후에도 고문으로 한경협에 적을 두게 됐다. 김병준 고문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으로 임명된 바 있다.
이에 대해 류 회장은 "이번은 예외"라며 "앞으로는 정치인을 고문으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보는 스타일"이라며 "정치인에 대해 우려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면 이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공석인 상근부회장에 외교부 관료 출신 김창범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가 유력하다는 것도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류 회장은 "아직 정해진 바 없으며 9월초 산업통상자원부 승인 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그룹은 한경연 회원사였던 5개 계열사(삼성전자·삼성SDI·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증권) 중 삼성증권을 제외하곤 한경협 합류를 결정했다. 단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권고사항은 충실히 이행하는 조건에서다.
삼성 준감위 권고안은 △경제단체로서의 역할에 맞지 않는 부도덕하거나 불법적인 정경 유착행위, 회비·기부금 등의 목적 외 부정한 사용, 법령·정관을 위반하는 불법행위 등이 있으면 즉시 탈퇴 △한경협에 회비를 납부할 경우 위원회의 사전승인을 얻을 것 △매년 한경협으로부터 연간 활동내용 및 결산내용 등에 대해 통보받아 위원회에 보고할 것 등을 골자로 한다.
이날 이찬희 준감위원장은 정기회의 참석 후 기자들과 만나 삼성증권의 재합류 보류에 대해 "삼성의 확고한 준법 경영의지와 준감위에 대한 신뢰가 융합돼 나온 결과"라며 "삼성이 그만큼 정경유착의 오해가 있을 소지를 미연에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아울러 향후 준감위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경련이 정경유착의 고리였다는 과거의 폐해를 극복하고 경제인들의 대표단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삼성을 통해 철저한 준법감시를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