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업계에서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지체상금에 관한 문제다. 이 중에서도 성실실패에 대한 지체상금 감면이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지체상금은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채권자에게 지급할 것으로 사전에 정해두는 금품 등을 말한다. 성실실패에 대한 지체상금 감면은 방산기업이 정부와 계약 후 무기체계를 개발하다가 계약 내용을 제때 이행하지 않더라도 지체상금을 물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성실실패에 대한 지체상금제도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경쟁업체에서 보면 불공정한 조치로 보일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가 입찰로 낙찰된 경우 그 불공정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성실실패 지체상금 감면의 불공정 위험
방산 관계당국은 방위사업법 제46조의4 제2항 제2호를 근거로 방위사업법 시행령(대통령령) 제61조의 10 제5항에 따라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한 때도 지체상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감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패를 용인하면서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기체계 연구개발 입찰은 대부분이 경쟁입찰이고 제안서 평가에서 고득점을 받은 1개 기업이 단독으로 개발하는 구조다. 하지만 낙찰받은 기업이 국내 최고 기술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게 방산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 제안서 평가가 기술력에 대한 변별력이 적고, 저가 입찰로 낙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술력이 아니라 저가 입찰로 낙찰받은 기업에게 고도의 기술이었다는 이유로 지체상금을 면제해 주면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에게는 불공정한 것이 된다.
실제로 이런 사례는 업계에서 종종 목도되고 있다. 약속된 기한에 인도하지 못할 경우 이에 대한 지체상금을 매길 수 있지만 성실실패로 보고 이를 감면받는 식이다.
일례로 최근 잠수함 구조함인 A 함정의 경우 지난 2021년 10월 진수식을 진행한 후 지난해 9월까지 해군에 인도됐어야 했지만, 9개월이 흐른 시점인 아직까지 인도가 이뤄지지 못했다. 함정 인도가 지체가 되더라도 통상 2~3개월 정도가 소요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것이 업계 평가다. 5차례나 인도가 연기된 A 함정은 지체상금만 수백억원이 발생할 것으로 보이지만 해당 조선소는 성실실패 지체상금 면제를 요청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방산업계 관계자는 "성실실패 지체상금 면제제도의 취지 자체는 부정하진 않는다"며 "특히 함정 분야는 상선과 달리 척수가 적고 관련 전문 인력도 한계가 있어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쳐야 성사되는 초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도록 A 함정 등 인도 지연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지체상금 부과가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판단 기준 미흡과 무분별한 입찰 경쟁 우려
이처럼 불공정성 논란 외에도 성실 개발에 대한 판단 기준도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 방위사업은 사업추진기본전략 수립에 따라 선행 연구를 거치고, 국내 기술 수준 성숙도 조사 결과에 따라 무기체계 연구개발 진입 단계를 결정하고 있다. 국내 기술 수준(TRL, Technical Readiness Level)이 4 이상이 돼야만 탐색개발을 시작하고, TRL 6 이상이 돼야 체계 개발에 착수한다.
처음부터 국내 기술 수준을 감안해 개발을 시작했는데, 개발에 실패한 뒤에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었다고 한다면, 그건 애초부터 사업 추진 방법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렇다 보니 자칫 선의의 제도가 무분별한 입찰 경쟁을 초래하고, 방위사업 질서를 저해할 위험이 도사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발 실패에 대해 성실성을 인정받아 지체상금을 면제받는 게 일반화된다면 기술력에 대한 고려 없이 일단 낙찰받고 보자는 식의 입찰이 만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송방원 우리방산연구회 회장은 "성실실패 지체상금 제도는 그 취지와 달리 적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자칫 불필요한 논쟁만 촉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평가 시스템 획기적 개선 필요
업계와 전문가들은 고도의 기술력이 전제 조건이 되도록 평가 시스템의 획기적인 개선 필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현재 인도가 수개월째 지연되고 있는 A 함정 등 책임을 명확하게 물어야 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운용의 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지체상금 부과에 있어 성실 실패의 범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도록 정량적 지표도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성실실패 지체상금 면제제도의 취지를 살리되 전문가들과 깊이 논의하고 외국 사례도 폭넓게 스터디를 해서 부작용 없이 안착시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송방원 회장도 "성실실패를 인정한 지체상금 감면의 전제조건은 기술력이 뛰어난 업체부터 선정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방사청의 제안서 평가 시스템부터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