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주식발행시장(ECM) 본부의 든든한 동아줄 역할을 해줬던 기업공개(IPO) 사업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투자심리 냉각의 파고를 넘지 못한 대어들이 줄줄이 상장 계획을 접으면서 주관을 맡은 증권사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반기 대어로 꼽히던 현대오일뱅크의 상장도 끝내 불발되는 등 IPO 시장 분위기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어 단기간 내 수익성 개선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IPO 수수료 수익 80% 뒷걸음
2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7월 신규 상장한 곳(스팩 제외) 가운데 미래에셋증권이 IPO를 주관한 기업은 5개사, 공모금액은 1740억원이다. 지난해 미래에셋증권은 21개사의 신규 상장을 맡아 8조9136억원의 공모액으로 IPO 주관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2위였던 한국투자증권은 올 들어 10개사의 상장을 주관했다. 공모 규모는 3027억원에 이른다. NH투자증권은 6개사, 공모액은 2936억원이다. 삼성증권은 4개사의 상장을 진행, 1105억원의 공모 실적을 올렸다.
이미 한 해의 절반이 넘게 지났지만 IPO 공모액 규모는 작년의 10분의 1에도 닿지 못한다. 이는 국내외 증시의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면서 IPO 계획을 철회하는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탓이다.
올 들어 코스피, 코스닥 시장에 신규 상장한 기업들의 공모액은 14조2000억원이다. 이중 1월 상장한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을 제외할 경우 1조4000억원에 불과하다. 이는 작년 동기 대비 80% 급감한 것이다.
한편 LG엔솔의 상장을 주관했던 KB증권만이 나홀로 플러스(+) 성장에 성공했다. 지난해 증권사 IPO 주관 실적에서 5위에 그쳤던 KB증권은 LG엔솔의 대표 주관사로 나서면서 상반기에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LG엔솔 발행주식의 22%를 인수하면서 수수료로만 196억원을 거둬들였다. 1분기에 벌어들인 인수 및 주관 수수료는 287억원에 달한다. 작년 한 해 수수료 수익이 216억원인데, 연간 수익을 단 한 건의 IPO 주관으로 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KB증권을 제외한 4개 증권사의 IPO 수익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IPO 인수 및 주관 수수료는 37억원으로 작년 1분기 200억원 대비 81% 감소했다. 한국투자증권은 37억원으로 48% 뒷걸음질 쳤으며 NH투자증권은 31억원으로 50% 줄었다. 삼성증권은 89% 줄어든 14억원에 그쳤다.
IPO 주관을 맡은 증권사는 기업의 상장이 완료된 다음 인수 주식의 일정 비중을 수수료로 받는 구조다. 기업이 상장 절차를 중단하면 주관사 주머니로 들어오는 수익은 '제로'(0)다. 최근 얼어붙은 시장 분위기에 IPO를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증권사들은 수수료 수익에 직격탄을 맞았다.
그중에서도 NH투자증권과 KB증권의 충격이 컸다. 현대엔지니어링, 원스토어와 SK쉴더스 등 시가총액이 조단위인 대어들이 수요예측 부진으로 인해 줄지어 상장 레이스를 이탈하면서다. KB증권은 현대엔지니어링과 원스토어 대표 주관을 맡았으며 NH투자증권은 SK쉴더스와 원스토어의 대표 주관사였다.
더욱이 증권사들은 지난 2년간의 IPO 시장 활황으로 담당 조직을 확대해 비용 부담도 크다. 지난해 KB증권은 IB본부 산하 ECM 부서를 3개에서 4개로 늘렸다. 삼성증권은 기업금융1본부 산하 IPO 팀을 2개에서 3개로 재편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상장 기업의 투자 업무를 돕는 IPO 솔루션팀을 신설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상장'이라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IPO 담당 부서는 아무런 보수도 받을 수 없다"며 "만일 중간 비용을 요구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그 증권사와 주관 계약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오뱅 철회, 교보생명 예심 탈락...악재 수두룩
하반기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녹록지 않은 증시 환경에 연내 상장을 목표하던 기업들이 하나둘 낙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어 중 하나였던 현대오일뱅크는 지난 21일 상장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두 차례나 상장을 철회한 뒤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시장 상황을 고려해 또 다시 상장 계획을 접었다. 현대오일뱅크의 시가총액은 최근 정유업계 호황을 타고 10조원으로 전망됐다. 몸값이 높았던 만큼 수수료 수익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지만 IPO 불발로 NH투자증권과 KB증권, 크레디트스위스증권 등 대표 주관사들은 빈손 신세가 됐다.
마찬가지로 5조원의 몸값을 평가받은 교보생명은 소송 리스크를 해소하지 못해 한국거래소 예비상장심사에서 탈락했다. 이에 따라 상장 절차도 잠정 중단된 상태다. 이 회사는 NH투자증권이 대표 주관사를 맡고 있다.
이밖에 자의적으로 상장을 미룬 곳도 있다. 불확실성이 높아진 가운데 2분기 실적을 확인한 다음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다.
쏘카는 기관 수요예측 일정을 8월 1~2일에서 같은 달 4~5일로 미뤘다.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예상 시가총액은 1조2000억~1조5000억원가량이다. 3조원대 시총이 예상되는 WCP는 8월에서 9월로 상장 시기를 연기했다. 쏘카의 대표 주관사는 미래에셋증권, WCP의 주관사는 KB증권과 신한금융투자다.
SSG닷컴, 케이뱅크, 올리브영, 오아시스마켓 등도 현재 상장을 준비 중이지만 시장에서는 불확실성이 크다는 의견이 나온다. 강승건 KB증권 연구원은 "금리 상승, 성장주에 대한 밸류에이션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IPO 시장의 위축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부 증권사 IPO 부서는 구멍난 수익을 메우기 위한 해결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까다로워진 기관 투자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성장성을 입증해야 하는 일반 기업보다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투자자를 모집할 수 있는 상품들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사는 "금융시장 침체기에 대비해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나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합병 형태의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