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증권사들의 랩(Wrap)·신탁 편법운용 의혹으로 금융투자업계가 술렁이는 가운데 이는 규제 공백 속에서 편법을 관행처럼 일삼은 안일함이 빚은 결과란 지적이 나온다.
법망을 피해 고무줄식으로 가격을 산정하고 손실보전을 위해 자전거래까지 한 것은 '관행 이전에 잘못'이라는 비판이다. 일각에서는 회계위반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어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랩·신탁 규제 공백 틈탄 '자의적' 운용
3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KB증권과 하나증권은 랩어카운트와 신탁상품 계좌로 유치한 자금을 만기가 다른 채권에 투자하는 '미스매칭' 운용으로 돌려막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손실을 숨기려고 다른 증권사에 있는 자사 계정을 통해 투자자 계좌의 채권을 장부가(매입 당시 가격)로 매수했다는 의심도 사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의혹은 현재 진행 중인 금융감독원의 검사 결과가 나와야 명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금감원은 이달 초부터 랩·신탁시장의 불건전 영업관행에 대한 테마검사를 진행중이다. KB증권, 하나증권 뿐만 아니라 다른 증권사로까지 추가 검사를 예고하고 있다.
이번 논란은 증권사의 채권 평가기준이 법상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먼저 문제가 된 랩과 신탁상품의 운용주체는 집합투자업자인 운용사가 아니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운용사가 채권을 펀드에 담을 때는 반드시 해당 자산을 시가(시장가격)로 평가해야 한다. 이는 가격 산정 시 시장이나 채권발행 주체의 상황을 반영하기 위함으로 자본시장법 제238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번처럼 랩과 신탁상품을 운영하는 건 증권사다. 앞서 보듯 자본시장법에선 이들의 상품 운용에서 편입한 자산을 정확히 '시가'로 평가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다. 사실상 규제의 사각지대다.
비단 이번 사태가 아니더라도 증권사들은 그간 이 틈을 타고 들어가 채권 운용에서 자사에 유리하게 자산 가격을 산정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1~3개월짜리 머니마켓랩(MMW)이나 특정금전신탁(MMT) 계좌에 만기가 1년 이상인 고위험 장기채나 기업어음(CP)을 편입하는 식이다. 모두 이들 채권을 시가가 아닌 장부가로 기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금융감독 당국도 이 부분을 인지해 주시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미스매칭 등 편법운용을 공공연하게 해왔다는 의혹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일단은 두 증권사에 대해서만 검사 중인데 진행상황을 봐서 다른 증권사들도 추가로 볼 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작년 하반기 기준금리가 10년 만에 3%로 인상된 여파에 시중금리가 급등하고,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이 경색되면서 본격화됐다. 장기채와 CP 가격이 모두 폭락해 평가손실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당시 CP 금리는 연 5%(91일물 기준)를 뛰어넘은 바 있다.
이번 의혹의 또 다른 축인 자전거래도 이 부분에서 비롯됐다. 투자자의 랩·신탁 계좌에서 발생한 채권 손실을 메꾸기 위해 KB증권이 하나증권에 있는 자사 계정으로 이를 평가손실 이전의 장부가에 사들였다는 것이다. 자전거래는 금융회사가 운용하는 펀드나 계정 간에 한 자금 거래를 뜻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자사 투자자 계좌에서 난 손실을 다른 증권사에 넘기고 다시 자기자본으로 손실을 보전했다면 간접적으로라도 자전거래에 해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증권가 "관행 이전 잘못" 자성…회계위반 가능성도
일각에서는 이 같은 편법운용이 관행이라는 주장이지만, 이번 의혹에 대해서는 증권업계에서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짙다.
일단 KB증권 측은 "만기 미스매칭 운용은 불법이 아니다"라며 "상품 가입 시 만기 미스매칭 운용전략에 대해 사전에 설명했고, 투자설명서에 계약기간보다 잔존만기가 긴 자산이 편입되어 운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 고지되어 있다"고 밝힌 상태다.
KB증권은 또 "연말 회계 결산을 위한 회계법인과의 논의 과정에서 기업어음(CP)을 장부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면서 평가 손실을 인식하게 됐다"며 "손실을 덮거나 고객의 손실을 받아줄 목적의 거래는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 증권사 임원은 "장부가든, 시가든 일관성 있게 운용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관행이라고 쉬쉬하고, 하면 안 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 분명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저위험 상품으로 짧게 가져가려는 투자자의 자산을 장기채에 투자하는 일종의 '작업'을 한 것"이라며 "업계 특수성을 고려해도 불법요소가 있었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전했다.
특히 자본시장법상 규정에 없어 증권사가 자의적으로 운용한 것이더라도 이와 별개로 회계위반 소지가 없지 않다는 설명이다. 금감원의 다른 관계자는 "회계처리 준칙상 시가로 평가하는 게 맞다"며 "운용사는 랩이나 신탁과 달리 수익자가 복수이기 때문에 법으로 또 한 번 박아둔 것일 뿐 시가를 반영해 자산평가를 하는 건 상식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이를 지키지 않으면 회계처리 위반이고, 집합투자업자인 운용사는 추가로 자본시장법 위반이 하나 더 붙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