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은 역대급 증시 활황 분위기를 만끽했습니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TSE)가 저PBR(주가순자산비율) 종목을 대상으로 PBR 높이기를 권고했고 다수의 일본 상장사들이 PBR을 끌어올리기 위해 주주환원 정책을 쏟아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도 일본을 따라 한국 증시를 활성화하겠다고 나섰는데요. 지난 2월 금융당국은 일본의 저PBR 정책을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놨습니다. 다만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세부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국거래소 산하 밸류업 자문단이 여러 차례 논의를 이어왔고 2일 기업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자문단이 발표할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에는 상장사가 직접 자본비용, 자본수익성, 지배구조, 주가 등을 고려해 회사의 적정 기업가치를 분석한 내용을 담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시를 보고 투자자들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상장사 역시 기업가치 상승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 제시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밸류업은 한국 증시를 활성화할 수 있는 '누이(주주)좋고 매부(기업)도 좋은' 정책으로 보이죠.
하지만 밸류업 정책에도 어김없이 걸림돌은 나타났습니다. 밸류업 정책을 이행할 주체인 상장사들이 난색을 표하고 나선 건데요. 기업가치제고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는 자기주식 소각,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 과정에서 지배주주의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죠. 상장사들은 밸류업 할 거면 경영권 방어 장치(차등의결권, 포이즌필 등)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차등의결권: 현행 상법은 1주당 1개의 의결권을 원칙으로 하지만 지배주주 등 특정 주주의 지분에 대해 다른 주주와 달리 더 많은 의결권을 인정하도록 하는 제도
*포이즌필: 신주인수선택권으로 불리며 적대적 M&A나 경영권 공격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지분을 매입하도록 권리를 부여한 제도
정말 밸류업을 하면 기업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을까요. 지난 2개월 간 각계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종합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유력해 보입니다. ①지배주주 존재가 이미 경영권 방어수단
혹시라도 경영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나오려면 우리나라 상장사들이 쉽게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전제로 깔려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간한 2023년 거버넌스 팩트북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상장사 중 1~3대 주주가 지분의 50%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비율은 절반이 넘습니다. 미국‧영국‧일본 등보다 특정 지배주주의 지분율 집중도가 훨씬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경영권을 위협받기에는 이미 한국 다수의 상장사들이 탄탄한 지분율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죠.
지난 26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세미나에 참석한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지배주주 지분율이 충분하고 코스피‧코스닥 대부분 경영권 위협이 불가능하다"며 "주총 특별결의나 이사선임 기준 역시 현재 지배주주의 지분율로 충분히 충족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경영권을 위협 받을 정도의 적대적 M&A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송옥렬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 주장의 이론적‧현실적 모순'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적대적 기업인수라고 부를 정도의 시도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송 교수는 △2003년 소버린-SK △2004년 헤르메스-삼성물산 △2006년 칼아이칸-KT&G △2015년 엘리엇-삼성물산 △2018년 엘리엇-현대차 모두 적대적 M&A라고 하기에는 취득한 지분이 적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지분이 어느 정도 있었어도 짧은 기간 동안 보유만 하다가 모두 매각한 사례가 많았다는 겁니다.
송 교수는 그나마 2020년 KCGI와 한진칼의 분쟁이 적대적 인수시도라고 부를 만하지만 이 역시도 가족 간의 경영권 분쟁에 KCGI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적대적 M&A라고 보기엔 어렵다는 분석도 제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적대적 M&A가 거의 없었던 것은 회사의 지배주주가 충분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나라 회사 소유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송옥렬 교수는 "결국 지배주주의 존재 자체가 경영권 방어"라고 강조했습니다. ②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수단이이라고요?
밸류업 정책이 상장기업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는 자사주 소각이 밸류업 수단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인데요.
앞서 지난 2월 기업거버넌스포럼은 기자회견을 통해 "삼성전자, 현대차 등 주요 상장사들이 보유중인 현금을 이용해 자사주를 사들여 이를 즉시 소각하는 주주환원을 하면 기업가치가 올라갈 수 있다"는 분석결과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금융당국 역시 자사주 소각을 중‧장기적 기업가치 제고의 수단 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사주 소각을 적극 이행해야할 상장사들은 자사주야 말로 유일한 기업 경영권 방어 수단이라 항변하고 있는데요.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가 우호적인 제3자에게 넘겨 경영권 안전망을 칠 수도 있습니다. 또 임직원에게 주식상여금 또는 스톡옵션을 줌으로써 사기를 높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자사주는 엄밀히 말해 지배주주가 아닌 회사의 소유물입니다. 자사주 취득의 주체는 지배주주가 아닌 회사이기 때문이죠. 회사의 소유물은 곧 소액주주를 포함한 전체 주주의 몫입니다. 자사주를 지배주주 즉, 특정 주주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은 자사주를 취득하는 즉시 소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는 워싱턴주는 기업이 자사주를 보유하는 것 자체를 불법행위로 봅니다. 선진국 사례에 비춰보면 상장사들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수단이라 말하는 것은 대놓고 지배주주의 사적이득을 위해 자사주를 사용하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죠.
인적분할 시 자사주를 지배주주 지분율 확대에 이용하는 논란도 계속 이어져 왔죠. 이 때문에 금융위원회는 인적분할 시 자사주에 신주배정을 금지하겠다고 밝혔고요.
우리처럼 자사주를 특정 지배주주에 유리하게 활용해 끊임없이 논란을 빚는 나라도 드뭅니다. 자사주는 지배주주가 아닌 회사의 것이고 회사의 주인은 주주인 만큼 특정 주주가 아닌 전체 주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겠죠. ③주주행동주의가 무서운 상장사들
최근들어 행동주의 펀드들이 상장사에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 역시 상장사들은 부담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금융당국이 밸류업 프로그램까지 내놓으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이 상장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는데요.
상장사들은 가뜩이나 각종 규제와 늘어나는 세금으로 경영하기 어려운 환경인데 밸류업 정책으로 인한 행동주의 목소리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밸류업 정책→행동주의 증가→경영권 위협'이라는 논리를 근거로 경영권 방어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동주의 펀드들이 보여준 모습은 경영권 위협이 아니라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리라는 요구였습니다.
송옥렬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자본시장에 행동주의가 등장한건 2022년입니다. 이때부터 주주환원률 상승 요구와 위임장 권유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얼라인파트너스-SM엔터테인먼트 △차파트너스-사조오양‧남양유업 △VIP자산운용-아세아‧아세아시멘트 △트러스톤 자산운용-태광산업‧BYC 등이 주요 사례입니다.
이들 행동주의 펀드들은 기업을 장악하고 인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주로서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송 교수는 "주주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펀드는 주주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메커니즘이 아닌가 싶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행동주의 펀드를 적대적 M&A와 같은 선상에서 볼 수는 없다"며 "행동주의의 등장과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은 아무효과가 없거나 이론적 근거가 없고, 적대적 M&A와 달리 행동주의는 다른 주주 투표(의결권)의 도움(주주제안 등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④회사 몸값 높이라는데 뭐가 문제죠
지금까지 지배주주 지분율, 자사주, 행동주의 펀드를 주제로 밸류업과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의 상관관계를 알아봤습니다. 결론은 이미 지분율이 탄탄하고, 자사주는 지배주주 사익추구 수단이 아니며, 행동주의는 회사를 먹을 생각이 없는 만큼 밸류업과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은 무관해 보입니다.
아울러 밸류업 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경영권 방어 장치를 요구하는 것은 소모적인 대립일 수밖에 없습니다. 밸류업을 정말 순수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말 그대로 기업 몸값을 높이라는 겁니다.
기업 몸값이 올라간다면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진이나 기업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배주주 모두 좋은 일입니다. 물론 승계를 해야 하는 지배주주는 기업 몸값을 낮추는 것이 더 유리해 일부러 주가를 올리지 않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죠.
어찌됐든 기업가치 제고라는 단어를 두고 기업과 주주 간엔 이견이 없어야 하고 지배주주와 소액주주 간에도 이견은 없어야 하는 게 맞는 겁니다.
지난 26일 열린 거버넌스포럼 세미나에서 김규식 변호사는 "지배주주는 다른 일반 주주의 돈을 받아 경영을 하는 사람이고 남의 돈을 받아 사업하는 지배주주는 경영권 방어보다 주주환원에 대한 책임이 먼저"라며 "경영권 방어라는 투자자를 무시하는 수단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는 "주주환원할테니 경영권 방어수단 달라는 것은 양비론이며 기계적 균형일 뿐"이라며 "경영권 방어수단을 도입한다는 건 지배주주의 권력을 천부인권처럼 만드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김형균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은 "최고의 경영권 방어 수단은 주가상승, 즉 기업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나라 상장사들의 지배주주 중심의 기업지배구조, 소액주주 권익 보호 문제는 해묵은 논제입니다. 한국증시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 주요 원인으로 꼽히죠.
지난해 9월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는 김주현 금융위원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지배주주에 유리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자사주의 발빠른 소각, 지배주주에 우호적인 상대에게 자사주 교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주 보유 문제 등을 언급하며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촉구했는데요.
이러한 해외 전문가들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나라 상장사들이 지배주주를 위해 움직이고 소액주주의 권익 확보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경영권 방어수단을 달라는 것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는 지점인 겁니다.
기업이 성장하길 바라는 것은 소액주주든 지배주주든 누구나 원하는바 일겁니다. 밸류업 역시 너도 나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자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특정 누군가의 이익이 아니라 지배주주와 소액주주 모두 기업가치 제고라는 하나의 이익을 향해 달려간다면 금융당국의 밸류업 정책도 연착륙해 결과적으로 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