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깊은 의약품들은 가장 처음 개발한 선구자가 있고 그 뒤를 이은 후속 제품들이 등장하며 경쟁구도를 구성한다. 제약업계에서 흥미진진한 경쟁을 펼친 쌍두마차 제품과 그 히스토리를 훑어본다.
'국민 피로회복제' 하면 많은 분들이 동아제약의 박카스를 떠올리실 겁니다. 반세기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데다 공익적인 메시지를 담은 광고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제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박카스가 한때 비타500에 국민 피로회복제 타이틀을 빼앗긴 적 있는 것을 아시나요? 비타500이 박카스의 친숙한 이미지를 깬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젊은층을 사로잡으면서 제약업계를 놀라게 한 장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비타500, 출시 4년 만에 박카스 넘다
동아제약의 박카스는 1963년 정제, 엠플 형태를 거쳐 현재와 같은 드링크(음료)로 시장에 나옵니다. 소위 '대량광고'라고 불리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박카스는 출시 1년 만에 670만병을 팔고 단숨에 자양강장 드링크 시장 1위에 오릅니다. 이후 정부의 광고규제로 성장세가 잠깐 꺾이기도 했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 부동의 시장 1위를 지켜왔죠.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등 굵직한 사건을 모두 견뎌낸 박카스의 입지를 흔든 건 예상치 못한 비타민 음료였습니다. 전국적으로 비타민 열풍이 불기 시작한 2001년 광동제약이 출시한 비타민드링크 '비타500'이었죠. '비타민을 한 병에 마신다'는 콘셉트가 적중하면서 비타500은 출시 2년 만에 1억병을 판매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며 박카스를 위협합니다.
비타500은 당대 최고로 유행하던 가수 비, 이효리 등의 스타 모델을 앞세운 청춘 마케팅으로 박카스의 올드한 이미지와 차별화하는데 성공합니다. 또 '비타500에는 카페인이 들어있지 않다'는 광고카피로 카페인이 든 박카스보다 성분 측면에서 더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동아제약이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하며 한동안 양사간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박카스는 이보다 앞서 1990년대 후반부터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는 등의 내용으로 젊은층의 감성을 자극하는 마케팅을 선보였지만 오랜 시간 쌓인 이미지를 깬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비타500의 매서운 성장세에 결국 2005년 건강 드링크 시장의 판도가 기울었고, 박카스는 비타500에게 분기 기준 매출액에서 처음으로 추월을 허용하는 일이 벌어지고맙니다.
박카스, 시장 1위 되찾은 두 번의 기회
동아제약은 의약품도 아닌 비타민음료에 자존심을 구긴 그해에 이전보다 타우린 성분을 두 배로 넣은 '박카스D'를 출시하고, 카페인을 함유하지 않은 '박카스 디카페'를 내놓으며 반전을 노립니다. 그러나 두 제품의 희비를 가른 건 이들 신제품이 아닌 예상치 못한 '벤젠사태'였습니다.
2006년 국내 환경단체가 시판 중인 비타민드링크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고 발표하자 비타민드링크 열풍이 차갑게 식었습니다. 비타500은 당시 벤젠이 검출되지 않았는데도 소비자들의 불신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박카스도 이 여파로 매출이 줄지만 비타500의 성장세가 더 큰 폭 꺾이며 시장 1위를 다시 회복했습니다.
박카스는 이후 비타500과 또 한 번의 격차를 벌릴 기회를 맞는데요. 바로 유통채널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2011년 동아제약은 박카스를 의약품에서 의약외품으로 전환하고 유통채널을 슈퍼, 편의점 등으로 확장했습니다. 약 50년간 약국 유통만을 고집하던 전략을 내려놓은 결과 박카스는 이전보다 넓은 소비층을 확보했고 7년 만에 연 매출액 1500억원을 다시 넘습니다.
박카스는 이후 새로운 시도에 더욱 과감히 뛰어들며 젊은층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2018년 카페인을 무첨가한 '박카스맛 젤리'를 출시하고 최근에는 베스킨라벤스, 카카오프렌즈 등과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젊은 고객들과 접점을 늘렸죠. 그동안 비타500도 '비타500 제로', '비타500 스파클링' 등 다양한 제품군을 선보였지만 박카스의 기세가 더 매서웠습니다.
박카스는 지금도 국내 건강드링크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박카스 매출액은 약 2500억원으로 비타500이 올린 매출액(약1100억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2010년 들어 주성분이 박카스와 같은 핫식스, 레드불 등의 에너지드링크가 나오며 시장을 잠식하는 듯 했으나 이미 전 연령층을 아우른 박카스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동아제약은 이처럼 비타500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이전과 달리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비타500과 대결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는 광동제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박카스를 뛰어넘은 경험으로 식음료 사업의 잠재력을 보고 이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결과 연 매출액 1조원대 제약사로 올라섰기 때문이죠.
제약업계 관계자는 "박카스는 의약외품이고 비타500은 식음료로 엄연히 다른 제품군이나 과거 서로에게 여러 자극을 주고 받으며 함께 발전한 측면이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