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리콜 같은 미래 모습을 그린 SF영화를 보다 보면 빠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인간이 자동차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차가 달리는 공간은 육로든 하늘이든 제각각이지만 기능은 비슷하다. 목적지를 말하면 알아서 데려다주고, 때로는 주인공의 기분까지 묻는다. 영화 속 상상이었던 장면이 현실로 바짝 다가왔다.
자동차와 인공지능(AI)의 결합은 이제 낯설지 않다. 테슬라는 지난해부터 'xAI'가 개발한 생성형 AI '그록(Grok)'을 신차에 적용하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챗GPT 기반 AI 기술을 일부 차량에 적용한 데 이어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자체 차량용 생성형 AI 모델 '글레오AI'를 개발 중이다.
이런 흐름 속 프랑스 완성차 업체 르노는 한국의 SK텔레콤(SKT)과 손을 잡았다. 올해 초 공개한 신차 르노 필랑트에는 SKT의 차량용 AI 에이전트 '에이닷 오토'가 처음으로 탑재됐다. SKT가 외부 완성차 업체의 차량에 AI 어시스턴트를 얹은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 SKT의 생성형 AI가 차량 환경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직접 확인해봤다.
한국어 '잘알' 에이닷 오토
지난 2일 서울 을지로 SKT 본사에서 르노 필랑트에 탑재된 에이닷 오토를 체험했다. 호출 방식은 간단하다. '하이 르노' 또는 '에이닷'이라고 부르면 곧바로 반응한다.
에이닷 오토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어 대화가 능숙하다는 것이다. 한국어 특화 LLM '에이닷 엑스(A.X) 4.0'을 적용해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다. 운전자가 '하이 르노, 엉뜨 켜줘'라고 말하자 발열 시트가 곧바로 작동했다. 기존 차량 음성 비서에서 쓰이던 정형화된 명령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
구글이나 오픈AI 등 글로벌 빅테크의 모델은 영어 중심으로 설계된 반면, 에이닷 오토는 한국어 사용 환경에 맞춰 학습하는 덕분이다. SKT 내부 테스트 결과 한국어 음성 인식률은 95% 이상으로, 통상 허들로 여겨지는 90%를 웃돈다.
차량 제어 역시 음성으로 가능했다. "창문 열어줘", "실내 무드등(엠비언트 라이트) 최고 단계로 해줘" 같은 명령을 자연스럽게 수행한다. 다만 안전을 고려해 창문을 여닫는 기능은 핸들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해야 작동하도록 제한을 걸어뒀고 트렁크와 선루프 조작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음성 조작은 막아놨다.
LLM 기반인 만큼 최신 정보 검색도 가능하다. 차량에 대한 정보를 넘어 시사, 날씨 같은 일반적인 물음에도 답한다. 운전자가 "하이 르노, 미국 연준 의장이 누구야"라고 묻자, 에이닷 오토는 "1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케빈 워시를 신임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어요"라며 워시 신임 의장의 이력을 한 문장으로 짧게 읊어줬다. 이틀밖에 안된 핫한 뉴스였지만 빠르게 뉴스를 업데이트했다.
개인적인 대화도 가능하다. "나 오늘 헤어졌는데 저녁 메뉴 추천해줘"라는 말에 에이닷 오토는 "오늘은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을 것 같아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는 어떠세요. 든든하고 기분 전환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응답했다. 기계적으로 특정 문장을 반복하던 기존 음성 비서와 비교하면 한결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현으로 채워졌다.
출퇴근 패턴도 학습
에이닷 앱과 연동도 눈에 띈다. 에이닷에 미리 일정과 장소를 저장해두면, 차량에 탑승했을 때 해당 일정에 맞춰 목적지를 안내할지를 먼저 묻는다. 오후 3시 르노코리아 본사에서 업무미팅을 하기로 등록해놨다면 운전자가 따로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차량 화면에 '여기로 가시나요? 르노코리아본사'라는 안내가 뜬다. 운전자가 '예' 버튼만 누르면 네비게이션을 통해 바로 길 안내가 이어진다. 성격 급한 운전자에게는 꽤 반가운 기능이다.
회사나 집처럼 반복되는 목적지는 패턴을 인식해 자동으로 길 안내를 제안한다. 평일 오후 6시에 집으로 퇴근을 한다면 이를 에이닷 오토가 학습해 비슷한 시간대엔 집으로 목적지를 제시해준다.
SKT는 A.X 4.0을 차량 환경에 맞게 최적화했다. 모델이 지나치게 크면 응답 시간이 길어질 수 있고, 음성 기반 인터페이스라는 점을 고려해 답변 길이도 조정했다. 최병휘 SKT 프로덕트매니저(PM)은 "차량용 어시스턴트인 만큼 답변은 80~100자 수준으로 제한했다"며 "완성차 업체(OEM) 요구에 따라 설정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SKT는 향후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기능을 확장할 계획이다. 단순히 앱을 얹는 수준이 아니라, 차량별 마이크 위치와 환경을 고려해 음성 데이터 전처리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인식률을 끌어올린다. 이번 필랑트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기능이 가능하다. 기술적으로는 화자 구별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뒷좌석에 마이크가 있는 차량의 경우 뒷좌석 탑승자가 "창문 열어줘"라고 말하면 가장 가까운 창문만 열리는 식이다.
아직까지 개인 맞춤 설정이 디테일하지 않은 건 아쉬운 지점이었다. 예를 들어 차량 내 온도를 늘 18도로 유지해놓도록 하는 설정은 불가하다. 기술적으론 구현이 가능하지만 완성차 업체와 정보 공유 문제 등 해결해야할 산들이 남아있다. 최 매니저는 "차량정보는 완성차업체와 협의해야 하는 부분이라 기능을 넣진 않았다"며 "협의를 통해 충분히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객들과 르노에서도 피드백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을 업데이트할 예정"이라며 "정보 검색 중심에서 벗어나 실제 운전자들이 많이 쓰는 기능을 편리하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40분의 짧은 체험이었지만 SF영화 속 장면이 현실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자동차는 이제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