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에 대한 부담은 개인별로 체감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당사자들에겐 대체로 무겁게 다가온다. 직장인의 월급에서 일부를 떼는 근로소득세나 소비자가 물건을 구입할 때 자동으로 붙는 부가가치세는 마음먹고 피하기도 힘든 세금이다.
부동산으로 1억원의 차익을 낸 사람이 양도소득세로 4000만원을 낸다면 세금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6000만원을 벌었으니 그 정도 양도세는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웬만하면 세금을 아낄 궁리를 하게 된다.
10억원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종합부동산세 100만원에 벌벌 떠는 경우도 있다. 대출이 많거나 소득이 적어 세금을 낼 능력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금고에 재산을 쌓아놓은 채 엄살을 부릴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속사정에도 지켜야할 불문율이 있다. 법적 테두리를 벗어난 '탈세'나 세금을 밀리는 '체납'은 나 하나의 일탈로 끝나지 않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납세자들까지 힘 빠지게 만든다. 기업들의 세무조사를 봐주고 뇌물을 챙기는 국세청 고위직 비리도 '조세 정의'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 탈세와 체납 '구멍'…납세자 의욕상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탈세 행각은 서민의 납세 의욕을 꺾는 대표적 아이콘이다. 지난 달 검찰에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국내외 비자금 수천억원을 차명으로 운용하면서 546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다른 대기업 2~3곳의 역외탈세 혐의도 수사하고 있다.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역외탈세는 매년 적발 건수가 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역외탈세로 적발된 건수는 537건, 세금 추징액은 2조6218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국세청이 역외탈세자 중 조세범칙 혐의로 고발한 경우는 8%(45건)에 불과해 탈세 대응이 미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체납자에 대한 부실 관리도 매년 국세청 국정감사의 단골 메뉴로 나온다. 고액·상습 체납자의 경우 명단만 공개할 뿐 실효성은 크게 떨어지고 있다. 국세청이 지난해 새롭게 공개한 고액·상습 체납자는 7213명으로 이들의 체납액은 11조777억원이었지만, 실제 납부금액은 658억원으로 0.6%에 그쳤다.
가뜩이나 세수 부족으로 정부가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의 세금을 쥐어짜내고 있는데, 탈세나 체납을 저지른 자들은 유유히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살림에도 꿋꿋하게 납세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은 무너진 조세형평성에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다.
◇ 국세청 고위직 비리→미봉책 '악순환'
세금을 받아주는 국세청 공무원들의 비리 문제도 고질적 병폐로 꼽힌다. 특히 고위직들은 기업들과 결탁해 뇌물을 받고 세무조사를 봐주거나, 승진에만 눈이 멀어 상사에게 인사청탁과 함께 금품을 건네기도 한다.
역대 국세청장 19명 중 8명이 구속되거나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아직도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CJ그룹의 뇌물을 받은 전군표 전 국세청장과 허병익 전 차장이 구속됐고, 송광조 전 서울지방국세청장도 부적절한 처신으로 자진 사퇴했다.
그들이 법정에서 서로 잘못이 없다며 진실 공방을 벌이는 광경은 납세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며 고개 숙여 사죄하는 국세청장의 모습도 연례 행사일 뿐, 비리 근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세청은 고위직 비리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대국민 사과와 함께 방지대책을 내놨다. 2007년 말 사상 최초로 현직 국세청장 구속 사태가 벌어진 직후, 한상률 차장은 세무조사 과정에서 납세자와의 개별접촉을 금지하고, 고위직 사정을 전담하는 특별감찰팀을 설치했다.
2009년 8월 백용호 청장은 전임 청장들의 불명예 퇴진 이후 고위직에 대한 감찰기능 강화와 국세행정 변화방안을 내놨다. 뒤이어 이현동 청장은 2011년 5월 한상률 청장의 비리 연루가 드러나자 직무 관련자와의 골프 금지령을 내리고, 내부 감찰을 강화했다.
국세청 고위직의 연이은 비리 속에 28일 열린 세무관서장회의에서도 과거 비리 방지대책과 빼닮은 방안이 나왔다. 김덕중 국세청장은 100대 기업 관계자와의 사적인 식사나 골프를 금지하고, 고위공직자에 대한 상시 감찰반을 가동하기로 했다.
수년간 비리 때문에 그렇게 혼쭐이 났는데도 아직 대기업 관계자들과 사적으로 만나는 고위직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이전에 내놓은 자구책들이 보여주기에 급급했고,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세금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려면 탈세와 체납, 비리 등 구멍 뚫린 조세 행정부터 차분히 메우는 노력이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