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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52)은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면 책장에서 미술화집을 꺼내 든다.
그는 "미술품을 보고 있노라면 유체 이동하듯 생각이 온전히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고 말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골치 아픈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서 회장은 "미술은 일종의 테라피"라며 "완성도 높은 미술품에는 영적인 치유 능력이 있다"고 강조한다.
해외 출장길에서도 미술품에 대한 그의 관심은 뜨겁다. 빠듯한 일정에도 현지 미술관에 들러 작품을 감상하곤 한다.
서 회장은 "만약 가업을 잇지 않았다면 미술 평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美)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는 축구나 농구를 좋아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집안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모형 조립이나 레고 블록을 쌓으며 놀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머릿속 공상의 세계가 손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며 그는 희열을 느꼈다.
여기에는 부친인 고(故) 서성환 선대 회장의 영향이 크다.
선대 회장은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였다. 삼국시대 상형토기, 고려시대 차 문화를 대변하는 주전자와 잔, 조선시대 분청사기 등 조상의 손때가 묻은 다양한 작품을 모았다.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정수인 '수월관음도(보물 1426호)'와 조선시대 도자문화를 대변하는 '분청사기인화원권문장군(보물 1450호)' 등도 수집목록에 들어있다.
▲ 아모레퍼시픽 소장품. (좌측)조선 18세기 호작도, (우측 위)조선 19세기 나비단장 노리개. (우측 아래)조선 18세기 백자대호. (출처: 아모레퍼시픽 제공) |
서 회장은 부친의 미술품 수집 취미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다만 대상은 다르다. 서 회장은 현대 미술품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가 모은 작품 중에는 천경자 장우성 박생광 백남준 등 국내 작가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남아메리카 중국 등 해외 작가의 대표작이 다수 포함돼 있다.
서 회장이 미술품에 남다른 관심을 쏟는 이유는 미술·건축 등 예술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서 회장이 진두지휘하는 아모레퍼시픽이 예술 문화 공간을 마련해 운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모레퍼시픽은 제주 일대에 오설록 티뮤지엄, 오설록 티스톤,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 등 문화 공간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오는 2017년엔 서울 용산에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이 문을 연다. 이곳엔 선대회장의 고미술품과 더불어 서 회장의 현대미술 소장품이 전시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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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전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공공 미술 프로젝트인 'APMAP'(에이피맵) 이다. 지난 2013년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현대미술가와 건축가들이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전국 아모레퍼시픽 사업장에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는 2017년까지 기획된 'APMAP'(에이피맵)의 올해 전시는 오는 6월 경기도 용인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인재개발원의 야외정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전시는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된다.
전통 공예를 주제로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설화 문화전'도 아모레퍼시픽이 지난 2007년부터 매년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예술 프로젝트다.
서 회장의 목표는 '미'(美)를 선도하고 창출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아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조금씩 기여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고 백남준 작가의 비디오아트 작품 '거북선'을 경기 오산시 아모레퍼시픽 뷰티사업장 1층 로비에 전시한 것도 직원들이 예술품을 보며 미적 감각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밖에도 아모레퍼시픽의 사업장 곳곳에는 유명한 예술가들의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아모레퍼시픽 측은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는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사내에서 볼 수 있어 직원들의 반응이 좋다"며 "예술을 접하며 미적인 감각을 키우다 보면 앞으로 회사의 성장에도 밑거름이 될 거라고 본다"고 밝혔다.
▲ 린 티안미아오 작(作) '도토리 키 재기'(More or less the same). 아모레퍼시픽 소장품. |
■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고(故) 서성환 태평양 창업주의 차남이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거쳐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지난 1987년 태평양화학에 과장으로 입사한 후 태평양종합산업 기획부장, 태평양 재경본부 본부장·기획조정실 사장을 차례로 거쳤다. 지난 2002년 '태평양' 사명을 '아모레퍼시픽'으로 바꾼 후 2006년 대표이사를 맡았다. 지난 2013년 1월 아모레퍼시픽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해 활동 중이다. 지난해 총자산 66억 달러(7조1400억원)로 블룸버그가 발표한 '세계 200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