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스토리]는 평소 우리가 먹고 마시는 다양한 음식들과 제품, 약(藥) 등의 뒷이야기들을 들려드리는 코너입니다. 음식과 제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모르고 지나쳤던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읽다보면 어느 새 음식과 식품 스토리텔러가 돼있으실 겁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편집자]
제 자취 경력은 10년이 넘습니다. 대학 시절은 물론 취업 이후에도 결혼하기 전까지 혼자 살았죠. 그 시절 제 생활 패턴은 흔히 말하는 '방구석 폐인'에 가까웠습니다. 가장 귀찮은 일은 밥하기였습니다. 물론 밥을 하는 게 어렵지는 않죠. 하지만 쌀을 씻고 밥을 안친 후 30분 넘게 기다리는 것은 배고픈 자취생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밥을 다 먹은 후 설거지 거리가 늘어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고요.
햇반은 그때의 제게 '꿀템'이었습니다. 뚜껑을 조금 뜯어 전자레인지에 2분만 돌리면 따끈한 밥이 완성됐습니다. 냉장고 속 반찬 몇 개를 꺼내면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고, 다 먹은 후 뒤처리도 간단했죠. 플라스틱 용기를 그저 분리수거만 하면 됐습니다. 이 편의성 덕분에 저는 자연스럽게 햇반을 비롯한 즉석밥의 팬이 됐죠. 사실 지금도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종종 밥솥 대신 햇반을 들고 전자레인지를 찾곤 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지금 판매되고 있는 햇반의 표준 용량은 210g입니다. 한 개만 먹으면 뭔가 배가 덜 부르죠. 그렇다고 두 개를 먹거나 300g짜리 '큰햇반'을 먹자니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돼지'로 보일까봐 무섭기도 했고요. 햇반은 왜 210g이라는 애매한 양을 표준 제품으로 만들어졌을까요. 햇반의 제조사 CJ제일제당에 한 번 물어봤습니다.
조금 김빠지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1996년 햇반 출시 당시 소비자 조사 결과 남녀 평균 밥 한 그릇이 210g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자인 제게 햇반 하나가 조금 모자란 건 당연한 결과겠네요. 즉석밥을 만들고 있는 오뚜기·동원F&B의 답도 비슷했습니다. 조금 다른 답변은 "햇반이 시장을 선점한 만큼 추격을 위해 용량까지 벤치마킹한 것 아니겠느냐"정도였죠.
그렇다면 이 '평균적인 밥 한 그릇'이 어디에서 나온 수치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210g이라는 많지 않은 양이 표준이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거든요.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는 '대식국'이었습니다. 조선후기 기록을 보면 당시 한 끼 식사로 성인 남자는 7홉, 여자는 5홉을 먹었습니다. 당시 1홉은 약 60㎖(g)이었습니다. 한끼가 약 420g에 달하는 셈이죠.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 대부분의 생업은 농업 등 육체노동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반찬이 풍족하지 않았죠. 밥이라도 많이 먹어 소비되는 열량을 채워야 했습니다. 조상님들이 식탐이 많아 많이 드신 게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대식 트렌드는 현대까지도 이어집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수탈한 쌀 대신 보리·감자와 같은 부피가 큰 탄수화물 식품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릇이 더 커져야 했죠. 큰 밥그릇은 어느새 '문화'가 돼버립니다. 상황은 1950년대에 들어서야 바뀌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식량 생산량도 크게 줄었습니다. 전쟁 직후인 1953년~1955년 연평균 쌀 생산량은 일제 강점기때보다도 낮은 214만톤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절미운동'을 전개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밥을 덜 먹자는 운동입니다. 절미운동은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이 먹어온 사람이 갑자기 적게 먹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결국 정부는 1956년부터 미국에게서 밀과 보리 등 잉여 농산물을 원조받게 됩니다. 이후 '혼분식장려운동'을 전개해 곡물 소비를 줄이려 하죠. 곳곳에 쌀이 부족하니 밀가루를 많이 먹자는 표어가 붙던 시절이 바로 이 때입니다.
하지만 혼분식장려운동도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된 한 끼는 결국 '밥'이었습니다. 그것도 수북하게 쌓인 '고봉밥'이었죠. '보릿고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은 별미로 즐기는 보리밥은 이 때 '가난'을 상징하는 아이템이었습니다. 쌀 소비가 줄지 않자 결국 정부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듭니다.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된 '밥그릇'의 이미지를 바꿔버리겠다는 10여 년 간의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1973년 서울시는 '시범대중식당'을 선정합니다. 시범대중식당에서는 지름 11.5cm, 높이 7.5cm짜리 스테인리스 밥그릇 사용이 의무였습니다. 이 의무는 3년 후 서울시내 모든 음식점으로 확대됩니다. 밥그릇 규격은 그 사이 더 작아졌고, 80%까지만 밥을 채울 수 있도록 했죠. 이를 1번 위반하면 1개월간 영업정지, 2번 위반하면 아예 식당 문을 닫도록 하는 강한 처벌까지 마련됐습니다. 시범대중식당은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시범대중식당은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1980년 9월 12일자 조선일보에서는 "쌀 절약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기준이 모호하고 한공기를 더 먹어야 할 사람도 많아 사실상 대중음식값이 오를 수 있다"고 논평하기도 했죠. 하지만 시범대중식당은 처음으로 성공한 쌀 절약 정책으로 역사에 남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일한 정책이 시행되면서 국민들이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표준'으로 받아들이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에 담기는 밥의 양이 대략 200g 정도였습니다.
표준 스테인리스 밥그릇은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햇반이 개발됐던 1996년에도 마찬가지였죠. 햇반은 밥을 간단히 먹으려는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제품입니다. 거부감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적당한 양'임을 어필해야 했습니다. 식당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200g 언저리의 제품이 표준 제품이 된 이유입니다. 판매량도 210g 햇반이 표준임을 증명합니다. 210g 햇반은 출시 이후 지금까지 즉석밥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무엇인가 사먹고 있습니다. 가격 대비 양이 많은 제품은 널리 칭송받습니다. 그 반대의 제품은 곳곳에서 비판받곤 하죠. 하지만 그 용량이 어떻게 정해진 것인지는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흔히 구입하는 제품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한 번쯤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처 몰랐던 의미나 재미있는 역사가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햇반으로 배를 채우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의 든든한 한 끼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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