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의 왕
민족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유통업계도 준비가 한창입니다. 추석선물세트 본판매가 절정에 다다르면서 다양한 구성의 세트들이 백화점·대형마트 주요 매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커머스 역시 자체 구성한 명절 선물세트를 저렴하게 선보이고 있죠.
그 중에도 눈에 띄는 건 역시 과일세트. 그 중에도 '샤인머스캣'입니다. 작년, 재작년에 비해서는 그 명성이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샤인머스캣은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과일 중 하나입니다. 일단 알이 큼직하고 색이 아름다워 보기가 좋구요. 껍질을 까거나 씨를 뱉을 필요도 없어 먹기에도 좋습니다. 맛도 달콤하고 신 맛이 적어 한국인이 선호하는 과일의 맛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최근에 먹은 샤인머스캣은 맛이 그냥 그렇던데"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샤인머스캣의 맛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지도 꽤 됐죠. 그런데 또 대형마트에 가 보면 어디서나 '당도 보장'을 내걸고 있습니다. 달콤함을 보장한다는 의미일 텐데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홈플러스는 최근 대구 칠곡에 메가푸드마켓을 오픈하면서 오픈 기념으로 '15브릭스 샤인머스캣을 9990원에 판매한다'고 알렸습니다. 이마트도 지난달 '슈퍼포도페스타'를 열며 15브릭스 당도측정 샘플링을 통과한 제품만 엄선했다고 밝혔죠. 이쯤되면 15브릭스가 '달콤한 포도'의 기준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소비자들은 입을 모아 '샤인머스캣이 덜 달다'고 말하는 걸까요. 혹시 저에게 이야기를 했던 분은 '뽑기'에 실패한 걸까요.
왕의 자격
이유는 의외로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국내 포도 농가의 대표 격인 한국포도회는 샤인머스캣의 권장 출하 당도를 '18브릭스'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크기 기준도 있습니다. 한 송이에 500g은 넘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돼야 샤인머스캣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운영하는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서 낸 '제철농수산물 동향조사보고서'에서도 샤인머스캣을 설명하며 '당도는 18~20브릭스'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중에서는 18브릭스가 넘는 샤인머스캣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판매업체들이 14~15브릭스를 '보장'하며 '고품질의 샤인머스캣'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서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이 15브릭스를 강조했다고 말했었죠? 반대로 이야기하면 시중에 15브릭스 이하 샤인머스캣이 넘쳐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눈에 띄게 저렴한 샤인머스캣의 경우 당도가 12브릭스 수준인 경우도 많다고 봅니다.
18브릭스가 기준이던 그 달콤한 샤인머스캣이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물량과 가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샤인머스캣이 처음 알려졌을 때는 소수 농가가 높은 가격을 받고 판매하는 '초 프리미엄 포도'였죠. 실제로 샤인머스캣 2㎏의 소매가는 2019년 3만6000원대로, 일반 캠벨포도(5400원대)보다 7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샤인머스캣이 과일 시장을 휩쓸면서 다른 과수 농가들도 샤인머스캣 재배에 뛰어든 건 당연한 이치죠. 대형마트, 이커머스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샤인머스캣 확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시장 초반에 제시했던 18브릭스 기준은 유명무실해졌죠. 일반 수입청포도와 별다를 것 없는 샤인머스캣이 쏟아져나왔습니다. '포도의 왕' 샤인머스캣은 곧 '물포도'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돈을 내시오
업계에서는 샤인머스캣이 예전의 위용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18브릭스가 넘는 초고당도 샤인머스캣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어서입니다. 균일한 품질로 많은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 대형마트나 이커머스에서는 15~16브릭스가 한계 수율이라는 설명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나무당 5~6송이를 남겨야 하는데 물량 공급을 늘리기 위해 10송이 이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며 "샤인머스캣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2020년 이후 포도 생산력은 꾸준히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18브릭스 이상의 '진짜' 샤인머스캣을 판매하는 곳은 있습니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올해 추석 선물세트로 선보인 '고당도 과일 선물세트'에서 18브릭스 이상의 샤인머스캣을 엄선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커머스에서도 플랫폼이 일정 물량을 확보하는 직매입 상품이 아닌 판매자가 직접 판매하는 제품을 잘 찾아 보면 18브릭스 이상의 샤인머스캣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 당도가 높은 제품을 찾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당도는 고스란히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8브릭스 이상을 보장하는 샤인머스캣은 1㎏에 1만원대 중반에서 2만원을 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시로 들었던 현대백화점 제품의 경우 4송이 세트가 17만원으로, 포도 한 송이에 4만원이 넘는 고가입니다. 쉽게 손이 가지는 않죠.
대형마트와 이커머스의 고민도 여기에 있습니다. 최고 품질의 포도를 찾아 높은 가격에 파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를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적당한 가격에 파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기본적인 달콤함이 보장되는 선에서 물량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식이었던 겁니다.
덕분에 샤인머스캣 가격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2019년 3만6000원대에서 올해엔 2만4000원대로 30% 이상 저렴해졌죠.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포도를 먹고 싶다면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샤인머스캣을, 진짜 '포도의 왕'을 즐기겠다면 백화점이나 직접 구매를 통해 프리미엄 샤인머스캣을 구매하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15브릭스짜리 샤인머스캣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공리주의적 포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