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건설사로 꼽히던 경남기업과 동부건설은 올 상반기 잇달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동부제철도 워크아웃이 유력시되고 있고, 포스코는 국내 계열사 수를 현재 48개에서 22개로 줄이는 고강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이 10%, 영업이익은 30%나 급감했다. 현대차는 해외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최근 넉 달새 주가가 35% 가까이 빠지기도 했다.
한국 주력산업의 현주소다. 비단 조선업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운과 건설, 조선 등 3대 취약업종의 부실이 철강은 물론 IT와 자동차 등 수출 전선을 이끄는 주력업종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장기 불황과 엔화 약세 등에 따른 여파가 일차적인 요인이다. 반면 일본에 치이고, 중국에 쫓기면서 산업 경쟁력 자체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일시적인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함정에 빠졌다는 얘기다.
◇ 한국 주력산업 벼랑 끝으로
실제로 한국 주력산업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실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재무상태가 악화하거나 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도 유동성 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해운과 건설에 이어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한 조선업종까지 이른바 3대 취약업종은 이미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철강과 정유, IT와 자동차 등 주력업종마저 시시각각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올 상반기 금융감독원의 ‘2015년 정기 신용평가’ 결과만 봐도 AA급 이상 초우량 대기업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됐다. 해운과 건설, 조선 등 고위험 업종은 물론 철강과 정유, 석유화학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 3년 연속 한계기업에 이름을 올린 기업만 3300여 개에 달한다. 전체 외부감사 대상 기업 중 15%에 해당하는 숫자다. 특히 조선과 철강•해운 등 업황이 좋지 않은 기업을 중심으로 좀비기업이 급속히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금융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상장기업의 가중평균 부도확률은 2009년 0.08%로 최저를 기록한 이후 2014년 0.22%까지 빠르게 상승하고 잇다 |
◇ 글로벌 장기 불황과 엔저 직격탄
그렇다면 그동안 수출시장을 휩쓸면서 승승장구해온 한국 주력산업이 줄줄이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전 세계적인 장기 불황을 일차적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전 세계 성장엔진으로 꼽히는 중국 경제가 주춤하면서 수출 전선에 급제동이 걸렸다.
아베노믹스에서 비롯된 엔저의 장기화도 주요 요인이다. 엔화 가치는 최근 3~4년간 40% 넘게 떨어졌다. IT와 자동차, 선박, 석유제품 등 대부분 수출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에 따른 충격파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조선과 해운업종은 글로벌 경기침체와 이에 따른 수요 부진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철강업종은 중국의 성장이 주춤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철강사들이 밀어내기 판매에 나서면서 고질적인 공급과잉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석유화학과 정유업종 역시 중국이 자급률을 높이고 있는 데다, 국제 유가마저 추락을 거듭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정유 4사의 영업적자만 1조 4000억 원에 달했을 정도다. 자동차와 IT제품의 경우 엔화 약세로 치명타를 맞고 있다.
◇ 산업 경쟁력 자체에 경고등
반면 우리나라의 산업 경쟁력 자체에서 이미 밀리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국 10대 수출품목을 8개 산업으로 재구성해 세계시장 점유율을 분석한 결과 철강•정유(2003년), 석유화학(2004년), 자동차•조선해양(2009년), 스마트폰(2014년 2분기) 순으로 중국에 추월당했다.
특히 한국이 기술력에서 훨씬 앞서 있다고 자신하던 스마트폰과 자동차 시장에서도 중국 기업의 추격이 거세다. 중국이 가격 경쟁력에다 기술력까지 갖추면서 우리나라가 수출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최근 중국의 국영 반도체 회사인 칭화유니그룹이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인수 계획을 밝히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배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역시 조만간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기술에서는 일본에, 가격에서는 중국에 밀리는 ‘넛 크래커(nutcracker)’에서 ‘역(逆) 넛 크래커’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엔화 약세 탓에 가격 경쟁에선 일본에 밀리고, 기술력에서도 중국에 따라잡히고 있다는 얘기다.
◇ 대대적인 산업군 재편 서둘러야
그러다 보니 외환위기에 이어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산업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제대로 된 구조조정 없이 기존 산업군을 영위하다 보니 이젠 한계에 달했다는 뜻이다.
기업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성장동력을 갉아먹는다. 좀비기업들에 지원이 집중되면서 새로운 성장산업의 출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띠라서 개별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넘어서 산업군 전반에 대한 밑그림을 다시 그리고 국가적인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구조적 쇠퇴기에 놓인 산업에 대한 대규모 대출이 은행에 심각한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산업구조 재편 과정에서 경쟁력이 없는 산업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도 일단 운을 띄운 상태다. 주형환 기획재정부 차관은 최근 한 강연에서 “한계기업의 재무적 구조조정도 중요하지만, 조선과 해운, 건설, 철강 등은 산업 자체의 공급과잉 측면이 있다”면서 “실물 측면에서 과잉공급을 조정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재무적•실물적 구조조정을 병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