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는 첫 기자간담회에서 합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재벌 개혁을 언급했다. '삼성 저격수', '재벌개혁 전도사'라고 불리던 그가 최근 우클릭한 것 아니냐는 세간의 시선에 대한 답이다. 말랑말랑해진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긴 했지만 '합리적인 방안'을 찾겠다며 한 수 접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김 내정자는 20여 년간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외부자'로서 재벌개혁을 외쳐오다가 처음으로 관직에 서게 됐다. 게다가 재계의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를 이끄는 자리다. 그가 발탁되자 재계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지만 그는 마구잡이식 칼잡이가 되지 않을 거라는 의지부터 내비쳤다. 재벌을 해체하거나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설명이다. 그의 '변신'에 관심이 쏠린다.
▲ 그래픽/김용민 기자 kym5380@ |
◇ 시민운동가에서 '재계 검찰' 수장으로
김상조 내정자는 재벌개혁에 정통한 경제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 활동해왔다. 경상북도 구미 태생(1962년)으로 서울대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석·박사 과정까지 밟은 국내파 경제학자다. 1994년부터 한성대에서 제자를 양성했고 1999년 참여연대가 만든 재벌개혁감시단장을 맡으면서 재벌개혁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함께 소액주주 운동을 이끌며 손발을 맞추기도 했다.
김 내정자는 국내 재벌들의 불공정 행위에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해왔다. 그중에서도 삼성그룹과의 악연이 자주 거론된다. 그는 삼성 승계의 고비 때마다 편법과 불공정 행위를 끈질기게 제기해왔다. 대표적인 게 삼성에버랜드 CB(전환사채)와 삼성SDS BW(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 논란이다.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승계를 위한 첫 단추였던 이 사건에서 김 내정자는 편법 승계 논란을 끌어내며 주목받았다.
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도 문제를 제기했고 최근에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해 특검 수사 과정에서 이 부회장의 포괄적 뇌물죄 성립에 논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정부와 정치권에서 자문기구 등을 통해 삼성 등 재벌과 관련한 정책의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곽'에서 재벌 견제의 역할을 해왔던 김 내정자는 지난 3월 문재인 대선 캠프에 합류하며 정치권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다. 문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공정거래위원장 하마평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결국 현실이 됐다. 그동안 외곽에서 훈수만 뒀다면 이제 내부자로서 '재계의 검찰'을 이끌게 된 것이다.
◇ 재벌 해체(?)…"재벌 효과와 존재 인정"
김 내정자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발탁되자 재계 안팎에서는 당장 '재벌 저승사자'라는 수식어를 떠올리며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아니라며 손사래부터 쳤다. 김 내정자는 오히려 "저는 재벌을 해체하자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재벌 대기업 없이 한국 경제가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며 "재벌 그룹이 소중한 자산으로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재벌 개혁"이라고 설명했다.
김 내정자가 그동안 해왔던 주장도 사실 '거친 개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논문 등을 통해 재벌 기업의 생산성과 시너지 효과를 인정하는 데서 '개혁론'을 시작한다. 다만 기업과 총수 일가가 갖는 권한에 맞춰 책임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그는 또 순환출자 금지나 금산분리 강화 등 강력한 정책을 도입하기보다는 현행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기만 해도 재벌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삼성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김 내정자는 지난 2013년 삼성의 사장단 회의에 초청돼 강연하는 등 삼성과 '상생'의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 삼성의 핵심 인사들과 꾸준히 의견을 나누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변화의 기로에 선 삼성에 김 내정자가 최악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오히려 삼성을 잘 알기 때문에 '적'이 되기보다는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김 내정자는 또 자리가 바뀐 만큼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하겠다고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20년 동안 공정위 밖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며 생각한 것이 많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다 할 수는 없다"며 "이제는 공정위 안으로 들어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서 결정되는 바를 신중하고도 지속 가능하게 추진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 "서민에게 좋은 일자리 주는 생태계 만들 것"
김 내정자는 임기 동안 재벌 개혁에만 몰두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 정권의 정책 목표에 맞는 운영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지원 사격하겠다는 의지다.
그는 "인생 항로를 바꿔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제가 생각하는 재벌개혁과 대통령이 생각하는 재벌개혁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라면 경제민주화의 본령은 하도급·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영세자영업자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김광두(왼쪽) 현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와 함께 경제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문재인 대선 후보 당시 홈페이지) |
김 내정자는 그러면서 앞으로 공정위가 행정력을 총동원해 집중할 부분을 '서민의 삶의 문제'로 꼽았다. 가맹점과 대리점, 골목 상권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합리적이고 효과 있는 정책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다.
그는 "공정위가 해야 할 일은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재확립해 한국경제의 활력을 다시 살림으로써 국민에게 더 많은, 좋은 일자리 주는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라며 "재벌개혁은 궁극적 목표에 가기 위한 과도적 목표"라고 설명했다.
◇ "4대 그룹에 집중해 시장에 일관된 메시지"
김 내정자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내각 입성으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이전보다 위상이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은 이미 대선 공약을 통해 '공정위의 역할 강화'를 공언했고 대기업 관련 조사와 처벌 강화 의지를 내보였다.
당장 대기업 전담 조직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기업집단과를 기업집단국으로 확대하는 방식이다. 김 내정자는 "조사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기업집단국이라고 부르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가장 강력한 조직이던 '조사국'의 부활이다.
그는 일단 삼성과 현대자동차, SK, LG 등 국내 4대 그룹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먼저 재벌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김 내정자는 "4대 그룹 등 상위 그룹에 집중해서 법을 엄격히 집행하는 게 오히려 효과적"이라며 "(이를 통해) 시장의 경제 주체들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 자발적으로 변화된 환경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