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관행이 오늘의 비리가 됐다. 채용비리가 확산되고 있는 은행업계 얘기다. 남성과 명문대 등을 우대하던 짬짜미 채용관행은 이제 성차별과 학력차별 등 채용비리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검찰 수사는 은행 인사 책임자를 넘어 관행을 묵인한 최고경영자로 향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 30일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등 혐의로 함영주 하나은행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지난 4월 금융감독원 검사 결과, 함 행장은 2013년 충청사업본부 대표시절 한 시장 비서실장의 자녀를 '추천'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최근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는 등 경영 수뇌부를 압박하고 있다.
금감원 감사 결과 2013년 하나은행 채용과정에서 최종합격자 229명중 32명(14%)이 추천 등 특혜 합격했다. 남녀 채용비율을 4대 1로 차등채용했고, 명문대 졸업자 점수는 높이는 대신 다른 대학 졸업자 점수는 낮췄다.
채용비리는 하나은행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해 초 금감원은 국민은행 등 11개 시중은행에서 22건의 채용비리 정황을 적발했다. 이 검사에서 채용비리 의혹이 나오지 않았던 신한금융도 최근 추가로 진행된 검사에서 총 22건의 특혜채용 정황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자녀의 면접을 봤고, 면접에서 "태도가 이상하다"고 지적받은 지원자는 임원의 자녀란 이유로 합격했다.
채용비리는 금융업계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위협하고 있다. 작년 말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채용비리 의혹에 사퇴했다. 올해 초 박인규 DGB금융지주 회장은 비자금 의혹에 채용비리까지 겹치면서 사임했다. 지난 3월 최흥식 전 금감원장이 2013년 하나금융 사장 시절 채용비리 의혹에 휘말려 낙마했다. 현재 채용비리 수사를 받고 있는 KB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도 긴장하고 있다.
은행에 채용청탁이 몰리는 이유는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입행 경쟁률은 높아지고 있다. 대학생들은 은행 입사 준비를 '은행 고시'라 부르며 각종 스펙을 쌓고 있다. 작년 4대 시중은행 평균 연봉은 하나은행 9200만원, 국민은행 9100만원, 신한은행 9100만원, 우리은행 8700만원 등으로 입행만 하면 연봉 1억원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된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각종 이권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 최흥식 전 금감원장은 사퇴 직전 "관행이었을 뿐 채용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 해명은 금융권에서 채용관행이 얼마나 뿌리 깊게 내려있는지 보여준다. 최 전 원장은 친구의 아들을 입사과정에서 추천했고, 이 지원자는 서류전형 합격기준에 1점 미달했지만 합격했다.
특히 대주주가 없는 지배구조 특성상 은행은 각종 이권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올초 김태영 전국은행엽합회 회장은 다른 산업에 비해 유독 은행에서 채용비리가 이어지는 것에 대해 "주인이 없다보니 편해서"라고 말했다.
금감원의 감사 결과 정치인, 청와대 직원, 언론사 사주, 금감원 직원 등 각계각층에서 은행권에 채용을 청탁했다. 여기에 고액 자산을 예치하고 있는 고객 등의 채용청탁도 거절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김 회장은 자산가 자녀가 입행하는 것에 대해 "그런 부분(영업력)을 감안해 뽑는 은행도 있고, 그것은 문제라서 아예 잘라내는 은행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업계도 다소 억울해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도 기업이고, 회사의 경영판단에 따라 직원을 뽑을 자율권이 있다"며 "경영과정에서 고액 자산을 유치해야 하는 은행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은행 최고경영자 연임과 맞물려 채용비리 사건이 관치 도구로 활용되고 있지 않으냐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반 기업은 채용할 때 개인의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왠만한 곳에서 채용청탁이 들어와도 기업의 운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생각에 거부한다"며 "하지만 정부의 규제를 많이 받는 은행은 개인의 역량보다 채용을 추천한 사람과의 인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 밖에서 은행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