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0만명이 넘게 가입한 실손보험을 매년 갱신 때마다 계약자와 만나 중요 사항들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면 어찌될까요? 보험사 업무가 사실상 마비될 겁니다.
갑자기 무슨 얘기일까 싶지만 얼마 전까지 보험사가 실제 고민했던 내용입니다. 오는 3월 25일 시행을 앞둔 '금융소비자보호법(이하 금소법)'으로부터 불거진 고민인데, 금소법 관련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금융업권의 소비자보호 규정을 한데 모으는 '통합법률'인 탓에 '규제 형평성'을 중시하다 보니 개별 업권의 예외규정이나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실손보험 갱신 때마다 3800만 계약자에게 연락할 뻔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한 예로 보험업법의 중요사항인 '설명의무'를 들 수 있습니다.
보험업법에는 보험계약시 보험사나 보험모집종사자(보험설계사, 보험대리점 등)가 ▲보험료 ▲보장범위 ▲보험금지급제한 사유 등 중요사항을 계약자가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확인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이 '설명의무'입니다.
설명해야할 중요한 내용이나 상황, 예시, 예외조항은 보험업법시행령, 보험업감독규정 등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금소법에 해당 내용이 이관되면서 보험업법에는 관련 조항이 사라집니다.
금융상품을 계약하는데 있어 소비자에게 전달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만큼 금소법에 담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금소법에는 보험뿐 아니라 은행, 증권, 저축은행 등 전 금융권의 소비자보호 규정을 담기 때문에 조항이 기존보다 단순화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워낙 내용이 방대하고 금융업권별로 차이가 존재해 규제 형평성 차원에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도록 선별해 넣어야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조항들은 법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될 전망입니다. 실손보험에 대한 걱정이 나왔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보험업법 '설명의무' 조항의 하위 법령에는 실손보험처럼 보장내용 변동 없이 3~5년 혹은 1년 단위로 갱신되는 보험계약은 설명의무 이행을 예외로 두고 있습니다. 연령이 증가하면서 갱신 시 보험료가 바뀌는데 이는 설명의무를 이행해야하는 중요사항입니다. 하지만 이외에 모든 보장 조건은 최초계약과 동일하기 때문에 설명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갈음하자는 것입니다.
≪보험업감독규정≫
제4-35조의2(보험계약 중요사항의 설명의무)
④ 보험회사 또는 모집종사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보험계약 체결을 권유하는 경우에는 최초 계약 체결시 중요사항을 설명하면 이후 계약 체결시에도 법 제95조의2제1항 및 영 제42조의2제3항제1호에 따른 설명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본다.
1. 이미 가입되어 있는 보험계약과 동일한 조건으로 갱신되는 보험계약
하지만 현재 금소법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빠져 있습니다. 아직 감독규정 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보험업계도 당국도 뒤늦게 관련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법안과 시행령에서 언급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위 법령에 위임하는 규정이 없다보니 감독규정에 넣을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갱신계약' 자체가 보험에만 적용되는 내용이다 보니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후순위로 밀렸기 때문인데 이외에도 보험을 비롯한 여러 업권에서 비슷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렇게 놓친 내용들을 모두 감독규정에 담을 수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 Q&A·가이드라인 통해 유권해석
고육지책으로 이처럼 금소법에서 빠진 부분들은 업계가 당국에 법안 질의를 하고 당국이 공식적인 답변을 주는 'Q&A'나 법령의 '가이드라인' 형식을 빌어 담을 예정입니다. 법에 넣을 수 없으니 유권해석 형태로 대신하겠다는 것입니다.
보험사들이 우려했던 3800만 실손보험 계약자를 매년 일일이 찾아가야할 일은 사라진 셈이죠. 하지만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실손보험 등에 적용되는 설명의무는 한 예일 뿐입니다. Q&A에는 보험뿐 아니라 방대한 내용의 업권별 특이사항이 담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들이 차후에 개정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통상 Q&A에 실린 내용이 차후 개정이 필요한 경우 해당 법안의 시행령과 감독규정 개정을 통해 이뤄집니다. 하지만 상위법률에 근거가 없는 조항들은 개정 자체가 어렵습니다. 업권별로 방대하게 모아질 Q&A 규정들에 모두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업계 법무팀 관계자는 "법, 시행령, 감독규정 상 명확한 근거가 없고 업계 전체로 통일하기 어려운 내용을 업권별로 Q&A로 모으고 있다"며 "개정이슈가 없는 것들은 문제없지만 차후 개정이 필요한 경우 법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수정 자체가 힘들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통합법으로 가면서 법안 내에 업권별 특성을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구조가 됐다"면서 "Q&A뿐 아니라 금소법, 시행령 등 법률에서도 특정 업권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규정을 바꾸는 게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정 작업도 어렵지만 차후 수정도 어렵기 때문에 지금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대응이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 엄두내기 힘든 금소법, 대응도 제각각
금소법 대응을 위해 개별 보험사, 업권을 아우르는 태스크포스팀(TF) 이외에도 정책과 현장을 연결해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컨트롤타워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됩니다.
현재도 보험협회, 보험사 간 업무별로 구체적인 시행준비 사항을 마련하고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분과별 협의체와 TF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별 대응력에 차이가 나는데다 금소법 시행 이후 발생하게될 문제들에 대해 세세히 분석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금소법 양이 방대한데다 새롭게 신설되는 규정들을 중심으로 살피다 보니 현장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며 "법안 시행시 현장에 생각지 못한 괴리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 법안과 현장 프로세스의 연결고리와 영향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고 현장 적용이 어렵거나 프로세스 변경이 어려울 경우 이를 파악해 전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이러한 상황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개별회사나 협회에서 의견을 모아 취합하고는 있지만 회사별로도 준법, 소비자보호, 기획 등 담당부서가 제각기 다른데다 회사 내 각 부서에 문제점이 될 만한 사항을 요청해도 금소법이 방대하다보니 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별다른 피드백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며 "법 시행 후 현장에서 기존 프로세스를 모두 바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존에 해오던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불거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우려했습니다.
실제 일부 회사의 법무담당 부서에서는 "(금소법이) 우리 회사의 문제가 아닌데다 양이 너무 방대해 잘 모르겠다"며 "부족한 부분은 업계 전체 방향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방대한 영역을 합치다 보니 기술적인 실수나 놓치고 가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회사별로 상황에 따라 준비에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놓치고 가는 부분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법 시행을 맞을 경우 자칫 대규모 혼란이 불거질 수 있어 더욱 적극적이고 분석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