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오너 일가들이 등기이사라는 중요한 자리를 내려놓는 데는 스스로의 뜻보다 외부변수들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
다수 그룹 총수들에 대한 검찰조사와 재판이 진행중이고, 형이 확정된 경우도 있다. 일정금액이상 연봉을 받는 등기임원들의 구체적인 보수를 공개해야 하는 법률도 시행된다.
등기이사 자리를 내놓고, 미등기 상태로 경영에 나서는 것이 자칫 불거지기 쉬운 논란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이사회 비우는 오너들..이유는 제각각
우선 SK와 한화의 경우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됨에 따라 등기이사를 내려놓은 경우다. 최태원 회장과 동생인 최재원 수석 부회장은 그룹내 모든 계열사 등기이사를 사임하기로 했다. 최 회장은 최근 징역 4년, 최 부회장은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으며 장기간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유죄판결과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개인 건강문제와 함께 관련법의 제약으로 인해 등기이사 자리를 내놓은 경우다. 현재 총포도검 및 화학류 관리에 관한 법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등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관련 회사 취업 또는 임원 선임을 제한하고 있다.
항소심을 앞두고 있는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비슷한 상황이다. 임기가 만료된 등기이사에 재선임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자리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올해부터 5억원 이상 연봉을 받는 등기이사들의 개인별 보수를 공개해야 하는 법이 시행되는 것도 오너들이 이사회를 떠나는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등기이사들에 대한 보수총액만 공개했지만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개인별로 얼마를 받는지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공개 대상자는 대부분 최고경영자들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약 200여개 기업의 620여명이 해당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연봉 자체는 개인의 문제인데, 이를 대중에게 공개하라는 것이 옳으냐는 시각이다.
특히 등기임원이 이사회에서 내리는 '경영상 의사결정'을 일반 근로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자칫 등기이사들의 연봉 총액이 일반인들에게 위화감을 주거나 흥미거리 정도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한편 경영에는 나서고 있지만 아직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정용진 부회장은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지만 지난해 사임했다.
◇ 등기이사 역할은?
등기이사의 등재여부가 관심을 모으는 것은 가지고 있는 권한과 책임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는 많은 임원들이 있지만 같은 직급이라도 등기이사 여부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달라진다.
가령 그룹의 부회장이라고 해도, 정작 등기이사를 사장이 맡는 구조라면 실제 중요한 의사결정은 사장이 한다는 의미다.
등기이사는 주주총회를 통해 선임되고, 사내이사와 사외이사들이 모여 이사회를 구성한다. 이사회에서는 기업의 투자나 인수합병 등 경영상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사실상 기업 경영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주로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2세나 3세들이 이사회에 등기이사로 올라가는 시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막강한 권한이 있는 반면 잘못된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하지만 최근의 경우처럼 외부변수로 인해 오너들이 등기이사를 내려놓은 사례들이 많아질 경우 지배구조의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오너들의 경우 등기이사가 아니더라도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이고 중요한 업무는 미등기 상태인 오너들이 결정하고, 이사회는 이를 따르는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