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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⑤보부상의 꿈, '백년 두산'

  • 2014.05.22(목) 11:09

비즈니스워치 창간 1주년 특별기획 <좋은 기업>
박승직상점→오비맥주→중공업그룹으로 변신
페놀사태로 그룹 존폐위기..사업재편으로 돌파

서울 종로4가 보석가게와 오피스텔이 모여있는 효성주얼리시티 앞.

이 곳은 재계 12위 두산그룹의 모체인 '박승직상점'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보부상이었던 매헌(梅軒) 박승직은 종로 시장, 남대문의 칠패시장과 함께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을 이루던 배오개(지금의 광장시장 일대) 거리에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인 1896년 8월 자신의 이름을 딴 포목점을 열었다. 이것이 100년 기업 두산의 초석이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당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기고(아관파천), 열강의 이권침탈에 맞서 개화 지식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발족하는 등 구한말 어수선한 시국이 펼쳐지던 때다. 박승직은 전라남도와 경상북도, 강원도 등에서 무명을 사다가 서울에 모여드는 중간상인에게 팔아 상당한 부(富)를 쌓았다.

두산그룹이 1996년 낸 '배오개에서 세계로-두산 100년 이야기'라는 책을 보면 "박승직은 상점을 설립할 무렵부터 이미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배오개의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젊은 나이에 성공해 주위의 신망을 얻은 박승직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한성상업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상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면포업계를 대표하는 상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 두산그룹의 모태가 된 '박승직상점'. 1896년 8월 문을 열었다. 두산그룹은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最古)기업 인증서를 받았다.


◇ 박승직 '주춧돌 놓고' 박두병 '반석에 올려놔'

박승직이 두산의 초석을 놓았다면 그의 아들인 연강(蓮崗) 박두병(1910~1973)은 지금의 두산그룹을 만든 주인공이다. 상업자본인 두산을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시킨 게 박두병 회장이다.

두산은 1990년대 후반까지 오비맥주로 대변되는 소비재 중심의 사업구조를 갖고 있었다. 건설(두산건설)이나 기계(두산기계)를 담당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그 뿌리는 오비맥주다. 두산건설의 전신인 동산토건은 맥주공장 개보수와 상하수 시설관리를 하던 동양맥주(오비맥주) 영선과가 그 시작이고, 윤한공업사(두산기계)는 제조시설 수리를 맡던 오비맥주 공무과가 독립해 나온 회사다.

두산그룹이 맥주사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박승직 때로 올라간다. 1930년대 일본 맥주업계는 거대시장으로 떠오른 만주지역 진출을 위해 한국에 계열사를 만든다. 일본에서 만주로 맥주를 실어나르기에는 수송비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이때 세워진 맥주회사가 조선맥주(하이트진로)와 소화기린맥주(오비맥주)다. 당시 일본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맥주회사 설립시 한국인 일부를 주주로 참여시켰는데, 그 가운데 한명이 박승직이다.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직물산업이 침체에 빠지자 박승직상점은 그 대안으로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개설해 맥주 위탁판매업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 박두병은 정부에 귀속된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이 됐고 한국전쟁 때인 1952년 34억원을 내고 이 회사를 인수했다.

 

▲ 박두병 회장은 1952년 3월 정부로부터 동양맥주를 불하받는다. 동양맥주는 1948년 소화기린맥주가 이름을 바꾼 회사로 박 회장이 해방 이후 관리지배인으로 있었다. 인수 당시 동양맥주 영등포공장은 건물의 40%,시설물의 50%가 파괴됐고 제품작업장은 불에 타 골격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하늘이 훤히 올려다보일 만큼 처참했다고 한다. 동양맥주는 1993년 오비맥주로 상호가 변경됐고, 두산그룹의 사업재편에 따라 1998년 매각됐다.


◇ 기업 존망의 기로 '페놀사태'

그 뒤 40여년간 오비맥주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맥주사업이 어려울 땐 코카콜라와 환타가 끌어줬고, 건설과 기계사업이 침체에 빠지면 오비맥주가 대규모 공장 신증설로 계열사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해외 유수기업과 합작으로 기술력을 높이고 새로운 사업영역에 진출하는 일도 계속했다.

 

합동통신사(연합뉴스의 전신)를 인수해 20년간 운영하다가 신군부의 강압으로 손을 떼고, 새우양식업과 여행관광업 등에 진출했다가 사업을 접기도 했지만 그룹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그 사건'에 비하면 이는 시련이라 보기도 어렵다.

1991년 3월16일. 이날 오후 2시부터 대구시내 달서구와 서구 주민들로부터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제보가 대구시 상수도본부와 각 언론사에 빗발쳤다. 이른바 낙동강 페놀누출 사고다.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이 누출됐고, 담당자들이 사고사실을 은폐하는 바람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한달 뒤 가까스로 조업에 들어갔는데 어이없게도 같은 사고가 또 터졌다.

 

이 일로 박용곤(1932~) 그룹 회장이 사퇴했고 정부에서도 환경처 장차관이 경질됐다. 대구에선 두산그룹 사원 신분을 밝히고는 밥 한끼도 사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두산그룹은 "창사이래 최대 위기였다"고 회고했다.

페놀누출 사고를 계기로 두산그룹의 주력인 맥주사업도 흔들렸다. 경쟁사인 조선맥주(하이트진로)는 1993년 5월 '지하 150m 암반 천연수로 만든 맥주"라며 '하이트(HITE)'를 앞세워 두산의 아킬레스건인 '물 문제'를 건드렸다. 이듬해는 "맥주를 끓여서 드시겠습니까?"라는 자극적인 광고문구도 등장했다. 오비맥주의 시장점유율은 뚝 떨어졌고 그 결과 1995년 그룹 적자규모는 9080억원, 부채비율은 625% 달하는 위기를 맞는다.

 

▲ 1991년 낙동강 페놀누출 사태를 다룬 신문기사들. 두산그룹은 페놀사태로 불매운동, 그룹 이미지 실추, 회장 사퇴 등 창사 이래 최대위기를 겪었다.


◇ 전화위복, 중공업으로 사업재편

지금도 재계에선 두산이 소비재 위주에서 중후장대형 그룹으로 변신한 결정적 계기로 '페놀사태'를 든다. 두산에 위기는 기회였다. 창업 100주년을 맞은 두산은 1996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한해 전이다. 상당수 기업이 속수무책으로 외환위기를 맞은 것과 달리 두산은 사업재편 결정을 남보다 빨리 내렸고 움직임도 신속했다.

먼저 소비재 위주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성 하기로 하고 한국네슬레, 한국3M, 한국코닥 지분은 물론 오비맥주 영등포 공장을 매각했다. 1997년에는 음료사업을, 1998년에는 주력사업인 오비맥주도 팔았다.

그 뒤 한국중공업(2001)을 시작으로 고려산업개발(2003), 대우종합기계(2005) 등을 인수하며 대표적인 중공업 그룹으로 환골탈태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담수설비(두산하이드로테크놀러지), 발전소 보일러(두산밥콕), 친환경 엔진(미국 CTI사), 소형 건설장비(밥캣) 등 원천기술을 확보한 해외 기업들도 차례로 인수했다.

두산은 1998년 3조3000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22조원을 기록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뤘다.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매출 23조원, 영업이익은 1조3000억 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두산은 이러한 변화의 동력을 '사람'에서 찾고 있다. 박승직상점 이후 사업구조는 크게 바뀌었지만 그 맥을 잇게 한 것은 결국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게 두산의 경영철학이다. 두산은 이를 '사람이 미래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 두산그룹은 소비재 위주에서 중공업그룹으로 탈바꿈했다. 왼쪽부터 시계방으로 두산인프라코어의 굴삭기, 두산중공업의 해상풍력발전기, 두산엔진의 선박용 저속 디젤엔진, 두산중공업의 해수담수화설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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