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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⑦민생을 진화시킨 삼양사

  • 2014.05.28(수) 08:06

비즈니스워치 창간 1주년 특별기획 <좋은 기업>
국민 '의식주' 업그레이드..설탕에서 의약품까지

1924년 농장에서 싹을 틔운 삼양사는 올해로 90주년을 맞았다. 설립자인 수당 김연수 회장(1896~1979)은 국내 최초의 기업형 농장을 일궈냈다. 1930년대에는 만주까지 진출해 회사를 키웠다.

 

이후 1950년대 제당 사업에 뛰어든 데 이어 1960년대 화학섬유 사업, 1980년대 제약 부문까지 소비 트렌드의 변화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했다. 거센 풍파 속에서도 장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은 변화의 흐름을 재빨리 수용한 경영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 1930년대 삼양사 만주 봉천사무소

 

◇ 농장→염전→설탕공장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연수는 1924년 '낙토(樂土)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한다. 장성농장을 시작으로 7년간 호남 일대에 7개의 농장을 조성한다. 소작료를 낮추고 소작 권리를 반영구적으로 보장하는 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영농 조건을 통해 생산성을 높였다.

 

1931년에는 삼양사(三養社)로 이름을 바꾸고, 간척사업을 통해 농토를 확장했다. 5년 후 만주에 문을 연 봉천사무소는 국내 자본이 해외로 진출한 첫 사례로 이주 농민들의 농장 개간을 지원했다. 농장 개설뿐만 아니라 남만방적과 삼척기업, 오리엔탈비어 등 제조업체까지 운영하면서 사세를 넓혀 나갔다.

 

만주로 뻗어나간 삼양사는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민족 분단을 겪으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만주의 농장과 사업장을 모두 잃었고, 김연수는 매국노로 질타를 받았다. 농지개혁이 단행되면서 국내 농장들도 정부에 넘겨야 했다.

 

혼란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다. 당시 미군정청은 소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염전 운영을 민간에 개방했고, 삼양사는 1946년 소금 제조허가를 따냈다. 해리염전은 전쟁 포화 속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국내 최대의 민영 염전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삼양사는 울산에 설탕공장을 세우며 미래의 먹거리를 준비했고, 1956년부터 '삼양설탕'을 생산해냈다. 한때 기업의 전부였던 농장을 잃었지만, 소금과 설탕을 만들어 장수기업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당시 국내 제당업계에 뛰어든 삼양사와 제일제당(1953년)과 대한제당(1956년)의 경쟁 구도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1950년대 초창기 울산공장 전경

 

◇ 경제개발의 수혜…섬유산업 진출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사업은 점점 성장가도를 달렸다. 김연수는 1961년 한국경제인협의회(현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일본에 국산 설탕을 최초로 수출했다.

 

울산의 설탕공장 시설을 계속 늘리며 회사의 매출을 끌어올렸고, 여수와 목포에 수산물 가공공장을 짓는 등 수산업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불모지와 다름없던 화학섬유 분야로 눈을 돌렸다. 소금, 설탕, 수산물 등 먹거리에 집중하던 사업 포트폴리오를 한 단계 넓힌 것이다.

 

1963년 경영난에 빠져있던 전주방직을 인수한 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전주에 대규모 공장을 세웠다. 1968년 기업공개 후 5년 만에 매출이 33억원에서 206억원으로 6배 넘게 늘어났고, 자본금과 자산도 각각 5배와 2배씩 급성장했다.

▲ 1969년 전주화섬공장 준공식. 고(故) 김연수 회장(가운데)이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1975년 김연수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3남인 김상홍 회장이 경영 2세대로 전면에 나섰다.

 

김연수 명예회장은 신 사업에 진출할 때 "이 사업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영속성이 있고 발전성이 있는가, 종업원들이 그 보수로 생활할 수 있는가, 시설의 수명은 한계가 있으므로 투자에 대한 이윤을 보장할 수 있는가를 검토한다"고 했다. 이 원칙은 지금까지도 지켜지는 삼양의 불문율이다.

 

▲ 2003년 리모델링한 연지동 사옥

 

◇ "버릴 건 과감히"…선택과 집중

 

아무리 신중하게 사업 포트폴리오를 짰더라도 모든 분야에서 성공 가도를 달릴 수는 없다.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경영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삼양은 한계에 다다른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창업주의 손때가 묻은 영광농장은 1980년대 말 정부가 기업의 축산농장을 비업무용 토지로 규정하면서 사업성이 떨어지자 1990년 정리했다. 이듬해에는 견방사(絹紡絲)를 생산해온 전주2공장을 매각했다. 한때 섬유의 여왕이었던 견방제품은 1980년대 이후 원료 부족난과 불황을 겪으며 적자에 시달리던 상태였다. 1994년에는 36년간 지속해온 수산업에서 철수했다. 중국의 덤핑수출과 연안의 자원 고갈로 사업 여건이 악화됐고, 부실관리에 의한 대형사고로 큰 손실이 발생하면서 아예 사업을 접은 것이다.

 

1990년대부터 삼양을 이끌고 있는 김윤 회장은 '선택과 집중'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 회장은 사장 시절이던 1998년 사업 실적이 저조한 금융·무선통신업을 포기하는 대신 섬유와 식품·화학으로 핵심 사업군을 재배치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보다는 미래의 고부가가치 분야에 역량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가 회장에 오른 2000년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와 계약을 맺은 이후, 의약·바이오와 화학을 양대 축으로 세우고 기존의 식품사업에 신사업을 덧입혔다. 미래의 먹거리를 위해 신사업을 발굴하면서도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겠다는 삼양 특유의 경영 철학은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지난 90년간 민생을 진화시켜온 삼양은 '100년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 1993년 대덕에 문을 연 삼양종합연구소. 식품과 화학, 의약, 신사업 분야의 기술 혁신을 이뤄내고 있다.

 

큐원 설탕 제조사…"삼양라면 아닙니다"

 

삼양그룹은 2011년 출범한 삼양홀딩스를 지주회사로 두고 식품, 화학, 의약 부문에 집중하고 있다. 1955년 울산 최초의 근대식 공장인 제당공장을 세웠고, 1969년에는 전주에 폴리에스테르 섬유공장을 짓는 등 국민의 의식주를 한 단계 끌어올린 생활밀착형 기업이다. 2002년 출시한 식품 브랜드 '큐원' 설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삼양라면을 만드는 삼양식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지난해 삼양홀딩스를 비롯한 계열사 매출은 4조5763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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