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쑤(江蘇)성 우시(無錫) = 윤도진 기자] 거대한 장비가 설치된 클린룸 내부 천장에는 사과박스만한 운반장치 수 십 개가 물찬 제비처럼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레일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벽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윙윙'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1분에 300m를 달리는 속도입니다. 800억원 짜리 고가 반도체 장비를 놀리면 안되지 않습니까. 1초라도 장비를 더 돌려야 생산성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러려면 300mm 웨이퍼 25장이 들어간 운반장치가 장비와 장비 사이를 이동하는 시간을 3분 이내로 맞춰야 합니다."(SK하이닉스 우시 팹센터 팹운영 담당자)
중국의 경제수도 상하이(上海)에서 차로 2시간 반, 지난 달 찾은 중국 장쑤성 우시 SK하이닉스 팹(FAB)센터는 활기가 넘쳤다. 재작년 겪었던 악몽 같은 화재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006년 가동을 시작해 하이닉스 부활의 전환점이 된 이 팹센터는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효율로 SK하이닉스의 사상 최고 실적을 이끄는 주력부대 역할을 맡고 있다.
▲ SK하이닉스 우시팹센터 클린룸 천장을 날아다니듯 이동하는 운반장치. |
◇ 세계 D램 15% 쏟아내는 그룹 '캐시카우'
'단일 기업 중 장쑤성 최대 외자기업' '중국 최대 반도체 제조기업' ' 중국 DRAM시장 점유율 1위 기업(내부 거래 제외)' 현지에서 SK하이닉스 우시 법인을 일컫는 말이다. 2005년 착공해 2006년 하반기부터 양산을 시작한 이곳에서는 현재 월 평균 14만장의 300mm 반도체 웨이퍼가 생산되고 있다.
클린룸의 면적은 3만9500㎡, 축구장 4개 정도 규모다. 이 생산기지 안에서 재료와 제품을 나르는 운반장치 레일 길이는 총 13km에 달한다. 이 곳에서는 20나노급 공정을 주력으로 개인용 컴퓨터와 서버(Server), 모바일 기기, 그래픽 카드 등 D램(D-RAM)의 모든 어플리케이션을 생산하고 있다.
작년 매출 기준으로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D램시장 점유율이 27%에 달한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이곳 우시에서 생산한다. 이 같은 생산규모는 우시팹이 SK하이닉스의 다른 어떤 공장보다도 높은 생산 효율을 실현하고 있어서 가능하다.
우시팹의 생산 효율은 첨단 자동화 시스템을 바탕으로 수율, 단위생산량, 비용 측면에서 모두 국내 공장보다 우월하다. 국내에서는 연구개발(R&D)에 비용이 투입되고 양산 전 시험가동 과정을 거치지만 우시팹은 국내에서 검증된 생산기법과 장비가 투입돼 생산에만 주력하면 된다.
김의식 SK하이닉스 우시 팹센터장(법인장, 상무)은 "우시가 위치한 장강 삼각주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59%가 자리잡은 지역"이라며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용수, 전력, 토지 등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고 시장이 가까운 최고의 입지"라고 설명했다.
주변에 상하이와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등 대도시가 위치해 첨단 기술을 습득한 우수 인력을 영입하기 쉬운 것도 반도체 사업의 미래를 밝히는 배경이다.
▲ SK하이닉스 우시 팹센터가 자리잡은 우시고신구 종합보세구 정문. 우시 지방정부는 세금 감면 뿐 아니라 부지도 거의 무상으로 장기 임대해 반도체 산업을 유치했다. |
◇ '세계 최고 팹' 키운 우시의 기업정책
하지만 10여년 전 하이닉스가 이곳에 투자하기 전까지는 우시팹이 '효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이닉스가 한국을 떠나 중국 우시에 생산기지를 만든 데는 사연이 있다.
2003년 당시 하이닉스는 미국 정부로부터 5년간 '상계관세'를 부과받았다. 상계관세란 수출품에 장려금이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 상대 국가가 징벌적으로 부과하는 누진관세다. 하이닉스가 채권단을 통해 정부 보조를 받았다는 게 이유였다. 관세율은 무려 40%가 넘었고 미국에 이어 일본, 유럽연합(EU)이 뒤따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국내에서는 라인 증설에 필요한 자금유치를 할 수도, 공장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선택한 돌파구가 중국이었다. 국가적 전략산업으로 보호하고 있는 반도체 라인의 생산설비와 기술을 중국으로 보낼 수 없다는 반발도 있었지만 핵심 기술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 이를 무마했다.
이듬해, 하이닉스가 유럽계 ST마이크로와 합작으로 중국에 공장 설립을 신청하자 우시 정부는 기다린듯 화답했다. 우시는 산업단지 격인 고신구(高新區)의 종합보세구 내에 공장 부지를 50년간 거의 무상으로 내주고, 현지은행으로부터 신디케이트 론 방식으로 금융을 조달할 수 있도록 다리까지 놔줬다.
김 센터장은 "법인세를 최초 5년간 100% 면제, 이후 5년간 50% 감면해 주고 대출이자도 보조하는 등 설립 초기 우시 정부가 다양한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며 "인허가나 통관 등의 원활한 행정 지원을 위해 하이닉스 전담 정부조직인 '812소조(小組)'라는 팀을 둘 정도 였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우시의 적극적인 기업유치 정책은 각종 악재로 존폐의 기로에 섰던 하이닉스에 부활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현지 한 관계자는 "당시 우시 정부 내에서도 하이닉스의 재무 상태나, D램 업황 악화 등을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첨단 산업을 유치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정됐다"며 "당시 우시가 적극적 지원책을 내놓지 않았다면 지금의 하이닉스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재작년 화재를 겪었던 SK하이닉스 우시팹센터 생산동 건물(위), 분기별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추이에서 2013년 4분기 급격히 떨어졌던 하이닉스와 하이닉스 우시팹(SKHYCL) 점유율은 그 직후인 2014년 1분기 정상 수준을 되찾았다.(아래) |
◇ 시장 뒤흔든 화재도 '민관협력'으로 극복
재작년에는 불의의 사고도 있었다. 2013년 9월 공장건물 2층에서 일어난 불이 공기 정화장치를 타고 번져 3층 클린룸의 장비가 그을리는 등 피해를 입었던 것. 불은 1시간여 만에 진화되고 인명 피해는 부상자 1명에 그쳤지만 피해는 작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우시공장 화재 복구에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릴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왔다. 사고 직후 우시공장의 웨이퍼 생산량은 평소의 절반 이하인 월 6만장 수준까지 급감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수급이 깨져 D램 가격이 급등할 정도였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이 악재를 극복하고 3개월여만에 팹 운영을 정상화했다. 이 과정에서도 우시 지방정부가 '812소조'를 통해 환경평가 등의 절차를 빠르게 진행하는 등 도움을 줬다.
우시팹센터 대외협력 분야 관계자는 "사고 이후 비상대응체계를 재정비하고 방재시설을 대폭 확충했다"며 "협력사와 사고 상황별 훈련을 매주 진행해 초등 대처 능력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반도체 시장 성장률은 세계 평균(6%)의 3배를 뛰어넘는 20%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중국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향을 모색중이다. 아직 추가 투자나 사업 확대 계획이 결정된 것은 없지만 우시팹 센터 부지 내엔 2공장, 3공장을 지을 공터가 마련돼 있다.
김 센터장은 "SK하이닉스는 외자기업 중 거의 유일하게 공식법인명칭에 지역명이 아닌 '중국(China)'이라는 국호가 붙은 기업"이라며 "지금까지 일군 현지화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 속에서 더욱 단단한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