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蘇州) = 윤도진 기자] 상하이(上海) 훙차오(虹橋)역에서 중국 고속철 '가오티에(高鐵)'를 타고 30여분이면 닿는 중국 동부 도시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 역 앞 광장으로 나오면 고색창연한 성곽과 푸른 물빛의 수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예로부터 '강남(양쯔강 이남) 제일의 수향(水鄕)'으로 불려온 이 고도(古都)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풍광이다.
여기서 택시를 타고 20분정도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대문 모양을 한 초고층빌딩과 고급 아파트를 비롯해 자로 잰듯 쭉쭉 뻗은 도로, 새로 지은 큼지막한 건물들로 채워진 신도시 '쑤저우공업원구'다. 고풍스러운 연못과 정원으로 관광객들을 유혹했던 '동양의 베니스' 쑤저우는 이제 '동양의 실리콘 밸리'라는 별칭으로 옷을 갈아입고 글로벌 기업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 대비되는 모습의 쑤저우 기차역 앞 광장 전경(위)과 쑤저우공업원구 내 거리(아래) |
◇ 두 거인, 대륙 안에 싱가포르를 심다
지난 달 찾아간 쑤저우공업원구에서는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李光耀)를 추모하는 특별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얼마전 타계한 그는 중국과 싱가포르의 합작품인 이 공업원구와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전시관 입구에는 리콴유와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주석이 공업원구를 배경으로 함께 선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쑤저우공업원구의 탄생은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당시 개혁개방을 주도하던 덩샤오핑은 '아시아의 4대 용'으로 불리던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이 나라를 둘러본 그는 철저한 도시계획과 산업 관리방식에 감탄하며 "중국은 싱가포르를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을 들은 리콴유 당시 싱가포르 총리는 곧바로 "우리는 선진적 도시계획을 수출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중국 최초이자 양국 최대의 합작사업인 쑤저우공업원구 프로젝트는 이렇게 닻을 올렸다. 해외 제조업 기지가 필요한 싱가포르와 도시개발 및 기업유치 노하우가 절실했던 중국의 이해가 들어맞았다.
▲ 리콴유 회고전에 걸려 있는 덩샤오핑(위 왼쪽)과 리콴유(위 오른쪽)의 초상화, 1994년 손으로 그린 쑤저우공업원구의 청사진과 2015년 현재 개발이 완료돼 가고 있는 쑤저우공업원구 조감도(아래) |
리콴유는 중국 내 여러 후보지를 고르던 중 쑤저우 특산물인 '양면자수'를 보고 "이 손기술을 정보기술(IT)산업에 접목하면 엄청난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며 쑤저우를 최종 선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합작은 중국이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싱가포르가 자본 조달과 도시설계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회고전을 관장하는 산샤오후이(單小輝) 쑤저우공업원구 관리위원회 부주임은 "공업원구 내에는 지금도 싱가포르 기업이 전체 기업 수의 5분의 1을 차지한다"며 "쑤저우공업원구의 성공을 모델로 삼아 선전, 톈진 등의 중국의 대형 개혁개방 프로젝트가 뒤따랐다"고 설명했다.
◇ 서울 절반 크기의 IT·정밀기계 '메카'
공업원구는 서울 면적(605㎢)의 절반에 가까운 총 면적 278㎢의 규모로 조성됐다. 개발 전 이 일대는 흙탕물 가득한 호수를 낀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호수(3분의 1)를 제외한 지역에 제조업 생산단지와 주택 및 상업·교육지구가 채워져 가고 있다.
발전속도도 중국의 여느 도시보다 빨랐다. 2010년까지 이 지역 GRDP(지역내총생산)등 주요 경제지표는 연 평균 30%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작년 공업원구의 지역총생산(GDRP)은 2001억위안(35조여원)으로 전년대비 8.3%의 증가율을 보였다. 7%대로 떨어진 중국 성장률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산 부주임은 "공업원구는 쑤저우 전체 면적의 3.4%, 인구의 7.4%를 차지하지만 경제 규모로 따지면 쑤저우의 15%를 넘는 수준"이라며 "국가급 개발구 종합발전지수로 따지면 톈진에 이어 2위지만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국제경쟁력을 갖춘 개발구로 꼽힌다"고 소개했다.
공업원구는 진지(金鷄)호, 두수(獨墅)호, 양청(陽澄)호 등 세 호수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기능을 담당하도록 조성됐다. 중심부인 진지호 주변에는 랜드마크 격인 '동방의 문'을 가운데 두고 금융·상업지구가 들어섰으며, 두수호를 끼고는 대학과 연구개발지구가, 양청호 주변에는 주거·휴양지구가 자리잡았다.
▲ 쑤저우 공업원구 진지호 주변 전경 |
현재 공업원구 내에는 글로벌 500대 기업 중 92개 기업이 생산기지를 두거나 중국과 합작 투자를 하는 등 총 152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삼성을 비롯해 지멘스와 보쉬, 3M, 히타치, 에머슨, 파나소닉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들이 즐비하다.
김설화 쑤저우공업원구개발회사 고급경리는 "외자기업이 물밀듯 몰리면서 이제는 엄격한 평가를 거친 검증된 기업들의 투자만 받는다"고 설명했다.
◇ 첫 유치기업 삼성..23년간 '윈윈' 본보기
쑤저우공업원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바로 삼성이다. 삼성전자는 공업원구가 처음으로 유치한 '1호 외자기업'으로, 그야말로 공업원구의 역사를 함께한 동반자다. IT를 핵심산업으로 삼았던 공업원구의 유치 의지와 중국 시장 개척을 노리던 삼성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후 쑤저우는 삼성의 대륙 진출 전초기지가 됐다. 1994년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법인이 이 곳에 첫발을 들인 이후 삼성은 지금까지 56억달러를 투자해 12개 법인을 이 곳에 안착시켰다. 현지 한 관계자는 "원구 내에서 생산총액이 가장 많은 곳은 삼성 LCD법인,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곳은 삼성 컴퓨터 법인"이라고 귀띔했다.
삼성 입장에서도 메리트가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물이 많은 도시인 만큼 각종 라인에 필수인 공업용수도 풍부하고 주변에 상하이,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등 대도시가 있어 고급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잖다.
또 첨단 설비를 갖춘 라인을 설치하기에 자연재해 우려가 있는 서부 내륙지역보다 안전한 장점도 있다. 물류, 통관 측면에서도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 셴다이(現代)대도 변에 위치한 삼성전자 쑤저우 반도체 생산법인 전경. |
양측의 협력은 최근까지도 '윈윈' 사례를 낳고 있다. 공업원구가 최근 2차 산업 공장을 도심(진지호 서쪽)에서 바깥쪽(진지호 동쪽)으로 옮기고 중심부에 고부가 3차 산업을 채우는 '투이얼진싼(退二進三)' 정책을 펴자 도심에 1단지 라인을 두고 있던 삼성전자 반도체 법인은 기존 부지를 원구에 반납하고 외곽쪽 2단지 인근에 더 넓은 부지를 받아 이전을 마쳤다.
현지 관계자는 "삼성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반도체 1·2단지 생산라인을 합치는 집적효과를 얻고, 원구 정부는 대표적 외자기업으로부터 정책에 대한 호응을 이끌어낸 성과를 거뒀다"며 "양측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진 모범사례"라고 평가했다.
■ 글로벌 기업 사로잡은 쑤저우의 매력은?
쑤저우공업원구 프로젝트는 대륙에 싱가포르를 심는 것이었다. 도시계획과 기반시설, 물류시스템부터 채용과 급여, 사회보험제도까지 싱가포르의 방식이 그대로 도입됐다. 산샤오후이 쑤저우공업원구 관리위원회 부주임(사진)은 "지금까지도 공업원구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싱가포르에 파견돼 산업 유치 전략을 배워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쑤저우공업원구의 성공 배경을 물었다.
쑤저우 공업원구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양국은 경제 담당 부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정부간 협의체에서 공단 운영 문제를 결정하고 있다. 집행기관으로 공업원구 관리위원회를 두고 세부 사항들을 실행에 옮기며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중국 정부가 52%, 싱가포르가 28%의 지분으로 원구 개발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관리위원회는 외자기업들의 투자 상담부터 인허가 등 기업 활동에 필요한 대부분의 행정민원을 원스톱으로 처리한다. 부지를 알선하는 것부터 인력 확보나 환경문제 등 법인 설립에서 운영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2주일 안에 끝낼 수 있게 도와준다.
중국의 다른 성이나 시는 투자금액제한 규정에 따라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쑤저우공업원구는 대규모 투자에 대해서도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관리위원회가 투자 유치, 비준, 해외 투자자에 대한 비자 발급 등 주요 사항에 대한 독자적 결정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 공업원구 안에는 24시간 운영되는 독립세관이 있어 늦어도 10시간 안에 화물을 받을 수 있는 통관서비스가 이뤄진다.
인력 양성과 채용 지원도 선진적이다. 공업원구 내에는 중국 과학기술대, 인민대, 서안교통대 및 싱가포르 국립대, 영국 리버풀대 등 18개 명문대 캠퍼스가 입주해 있다. 기업들에게는 석·박사급 고급 인력 채용을 위해 고용 장려금이나 주거보조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