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이 전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수출이 부진한 상황이고, 내수 역시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내년 경제성장률도 2%대로 그치는 등 비관적인 전망들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대기업들의 사업재편, 한계기업 정리에 나선 정부 등 고도 성장기를 지나 침체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국내산업의 현 주소와 그 요인, 전망 등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코카콜라와 함께 세계적인 음료업체인 펩시는 지난 20일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바로 중국시장에 내놓은 신제품 때문이었다. 펩시가 내놓은 신제품은 바로 스마트폰. 'P1'이란 이름을 붙인 이 제품은 중국시장에서만 판매된다. 펩시의 이름이 붙었지만 제조는 중국업체 스쿠비가 맡았다.
이 제품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다. 안드로이드 체제에 곡면 디스플레이 등 쓸만한 하드웨어를 갖췄고, 가격도 10만원대에서 20만원대 초반이다. 초기 모델은 이미 매진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고 펩시가 스마트폰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 전략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 성장공식 안통한다
펩시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 주력산업중 상당수가 고전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의 성장공식이 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력산업은 그동안 선진국, 특히 일본 산업을 벤치마킹하며 이들을 따라가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전자나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등 현재 주력산업 대부분 이같은 방법으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고도성장기를 지나면서 이같은 주력사업들의 전략은 한계에 부딪혔다는 분석들이 많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이 장기화되고 있고, 수출비중이 가장 큰 중국의 경제성장 역시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력산업에서 경쟁하고 있는 일본기업의 부활과 신흥국 기업들의 추격은 한국 제조업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통계청이 24일 발표한 '2014년 기준 기업활동조사 잠정 결과'를 보면 금융보험업을 제외한 국내기업의 매출은 2231조원으로 전년보다 1.2% 감소했다. 통계청이 조사를 시작한 2006년이후 매출이 감소한 것은 처음이다. 법인세차감전순이익이 소폭 증가했지만 이는 국제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일부업종의 수익성이 개선된 영향이다.
문제는 국내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이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0년 16.3%였던 매출액 증가율은 2011년 12.2%, 2012년 6.0%, 2013년 1.1%로 급락했고, 지난해에는 결국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특히 제조업 매출이 55조원이나 줄었다. 통계청은 "대기업의 수출부진이 매출액 감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신현한 연세대 교수는 최근 세미나에서 "금융위기 이후 국내 제조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악화되고 있는 것은 수출의존도가 높아 기업들의 경영성과가 대외환경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라며 "매출원가가 높은 국내 제조업 특성상 영업현금흐름이 악화되면 투자를 줄여 성장 잠재력을 훼손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기술수준 하락·생산성도 둔화
국내 주력산업이 이같은 위기에 처한 것은 그동안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에 실패한 측면도 작용하고 있다.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이들 주력산업이 추격을 허용하자 어려움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국내 산업구조에서 기존 대기업 외에 새로운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결과 지난 2000년 이후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한 제조업체는 100만개중 단 7개에 불과했다.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이 300~500인 규모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비율도 제조업의 경우 0.06%에 불과했다. 1만개중 6개만 한단계 올라섰다는 의미다.
대기업들의 성장이 정체되고, 새로운 기업들도 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후발국가들의 추격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최근 산업연구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의 기술격차는 약 3.3년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3.7년에 비해 격차가 다시 줄었다. 중화학공업이 평균보다 높은 3.5년으로 나타났지만 경공업과 정보통신산업의 격차는 각각 2.9년과 2.6년에 불과했다. 특히 경공업은 지난 조사보다 기술격차가 1년 가량 축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제조업의 상대 기술수준 역시 하락세다. 올해 세계 최고 수준 대비 한국 제조업의 기술수준은 약 80.8%로 2011년 81.9%에 비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최고 기술수준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응답도 9.5%에 그쳐 지난번 조사에서 나타난 14.7%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제조업체들의 주력제품 기술수준에 대한 자신감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제조업 노동생산성도 둔화되고 있다. 한국의 취업자당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2010년 이후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고, 올 상반기에는 마이너스 상태를 기록했다.
산업연구원은 "2014년 이후 상반기까지 생산성이 감소세를 지속하는 등 부진을 보이고 있는 점이나 아직 OECD 중하위 수준인 시간당 생산성도 급격한 둔화를 보이고 있는 점은 우려할만한 측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 제조업이 추격자로서는 탁월한 성과를 보여왔지만 기존 추격형 발전전략은 점차 유효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산업 성장에 따라 어느 정도의 생산성 둔화는 불가피하지만 둔화의 정도가 지나쳐 역동성 상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