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이 전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수출이 부진한 상황이고, 내수 역시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내년 경제성장률도 2%대로 그치는 등 비관적인 전망들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대기업들의 사업재편, 한계기업 정리에 나선 정부 등 고도 성장기를 지나 침체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국내산업의 현 주소와 그 요인, 전망 등을 정리해본다.[편집자]
한국 주력기업 부진의 배경에는 중국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이 자국내 산업고도화에 나서면서 한국기업들의 중국수출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산업중 대부분이 한국의 주력산업들과 겹치거나 유사한 분야인 만큼 앞으로도 이같은 현상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이 늘어나면서 한국기업들의 시장도 잠식하고 있다. 철강이나 석유화학 등은 중국의 공격적인 물량공세에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중국은 최근 한국의 주력사업중 하나인 반도체시장 진출까지 시도하고 있다.
◇ '신창타이' 영향 본격화
'신창타이(新常態)'. 중국판 뉴노멀(New Normal)이라고도 칭해지는 이 단어는 최근 중국의 경제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수차례 신창타이를 언급하면서 경제 체질개선을 강조하는 중이다.
이 정책에 따라 고도성장기를 지나온 중국은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상태다. 과거 대규모 투자나 수출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수출의존도를 낮추는 대신 내수를 진작시키는 정책이 구사되고 있다.
특히 주력산업들의 고도화를 위해 자급률을 높이고, 가공무역을 줄이고 있다. 대(對)중국 수출비중이 높은 한국으로선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중국의 가공무역 비중은 2000년 48.5%에서 지난 9월 기준 31.0%까지 낮아졌다. 특히 최근 몇년간 하락률이 상대적으로 가파른 상태다. 실제 중국으로의 수출 감소 현상은 올들어 더 심화되고 있다. 한국의 중국수출은 올해 1월과 6월을 제외하고 모두 지난해보다 감소했다.
가공무역의 축소와 기존 사업의 고도화 외에 중국이 미래사업으로 낙점한 사업들 역시 한국과 겹치고 있다는 점 역시 우려되는 부분이다. 앞으로도 세계시장에서 중국과의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란 의미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최근 세미나에서 "중국의 7대 전략형 신흥산업의 대부분이 한국의 전략산업과 중복되거나 유사분야"라고 설명했다.
◇ 중국만 바라보는 철강..조선도 울상
공급과잉 상태에 빠진 철강이나 석유화학 분야는 직접적인 충격을 받고 있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서 내부에서 수요를 찾지 못한 물량들이 해외시장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저가공세는 국내기업들의 입지를 더 좁히고 있다.
철강의 경우 중국은 이미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한 상태다. 세계 철강시장에서 중국의 생산량 비중은 2001년 14.1%에 불과했지만 2007년에는 41.1%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기준으로는 55%에 달한다. 이미 세계 철강시장이 중국에 좌우되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중국의 생산능력이 시장규모에 비해 너무 커졌다는 점이다. 중국 기업들이 무분별한 증설에 나서며 결국 철강시장은 공급과잉 상태에 빠졌다. 장치산업이라는 특성상 물량조절이 어려워지자 중국 철강기업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중국 철강 수출량은 2011년 4940만톤에서 지난해 9380만톤까지 급증했다.
특히 물류비가 상대적으로 적게드는 한국시장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중국이 저가공세로 나서며 범용제품에서 강점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의 중국산 철강제품 수입량은 전년대비 34.9% 증가한 1339만5000톤에 달했다. 이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기업들에게 돌아갔다.
일단 중국 정부가 '신(新) 철강정책'을 통해 오는 2017년까지 생산량 8000만톤을 줄이는 등 공급과잉 해소에 나서기로 했다는 점은 다행스런 부분이다. 하지만 그 영향이 가시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공급감소 효과를 국내기업이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조선업도 중국, 일본과 경쟁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향후 전망이 밝지 않다. 지난 9월 기준 국가별 선박 수주량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에 이어 3위로 내려앉았다.
한국은 2월부터 6월까지 월별 수주량 1위를 지켰지만 7월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3분기 기준으로도 한국은 3위에 머물렀다. 4분기 들어서며 상황이 개선됐지만 전체 선박 발주물량이 감소하고 있는 만큼 중국, 일본과의 수주경쟁에서 앞서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자동차·석유화학도 '고전'
자동차산업도 중국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자동차시장은 글로벌 브랜드들의 합작사가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현지 로컬기업들이 뒤를 따르는 구조였다. 현대차와 기아차 역시 두자릿수 성장을 기록하는 등 중국시장에서의 성장이 해외공략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중국 로컬업체들이 약진하며 기존 시장을 지키기도 힘든 상황이 되고 있다. 중국 경기가 둔화되면서 보다 가격이 싼 로컬업체의 자동차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로컬업체들의 자동차 가격은 글로벌 브랜드와 비교해 약 60~70%선이다.
지난 상반기 기준 중국 로컬업체들의 판매량은 전년대비 28.7%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국 전체 자동차 판매가 8.3% 증가에 그친 것을 감안하면 전체 판매 대비 3배 이상 성장했다. 중국 로컬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도 지난 2012년 29%에서 올해 상반기 30%대 후반까지 상승했다.
로컬업체들이 약진하면서 중국 자동차 시장의 경쟁강도는 더 심해진 상태다. 기존 글로벌 브랜드들도 대대적인 가격인하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 1000만원에 육박하는 할인을 해주거나 무이자 할부, 보험 제공 등 판촉을 시작했다.
현대·기아차도 일부모델 가격인하 등을 단행했지만 경쟁 격화에 따른 부작용을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현대·기아차의 중국 판매는 10월말 기준 전년대비 9.7% 감소했다.
석유화학분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중국시장을 겨냥해 범용제품 위주의 설비증설에 나섰던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석유화학업계는 중국이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2000년대 중반 공격적으로 설비증설에 나섰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석유화학제품의 기초유분인 에틸렌의 국내 생산량은 2004년 596만1000톤에서 지난해 824만8000톤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석유화학 전체 수출물량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다.
하지만 중국의 석유화학제품 자급률이 높아지고, 경기둔화가 겹치면서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생산설비 구축을 진행해온 중국은 조만간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범용제품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기업들의 대형화와 글로벌화에 대비가 필요하다"며 "중국기업들은 철강, 화학, 조선, 자동차 등 주력산업에서 최대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반도체 공략도 '스타트'
중국이 반도체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점 역시 우려되는 부분이다. 아직 반도체시장에서 중국의 존재감은 미미한 상태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지난해 정책적으로 2020년까지 반도체산업을 세계 첨단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내놨다.
세계 반도체의 20%이상을 소비하는 단일 최대시장인 중국의 변화는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 중국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인수합병 시장에 뛰어든 상태다. 그동안 시스템LSI 분야에서 소규모 인수합병에 그쳤던 중국 기업들은 최근 대규모 거래를 성사시키며 반도체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칭화유니그룹이다. 칭화 유니그룹은 스프레드트럼, RDA마이크로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중국내 최대 반도체 설계회사로 부상했다. 이후 미국 인텔에 스프레드트럼과 DRA마이크로 지분 20%를 넘기며 기술제휴를 확대하고, HP 자회사인 H3H 지분 51%를 인수해 중국 서버와 스토리지 사업을 강화했다.
최근 미국 마이크론 인수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한 칭화유니그룹은 지난달 자신이 대주주인 웨스턴디지털을 통해 미국 샌디스크 인수에 성공했다. 샌디스크는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기업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은 삼성전자와 도시바가 전체 시장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미국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 샌디스크 등이 이들을 추격하고 있다.
칭화유니그룹이 간접적이나마 샌디스크를 품에 안게 되면서 우선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확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자오웨이궈 칭화유니그룹 회장도 최근 인터뷰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예고한 상태다. 그는 "미국 반도체 회사와 법인 설립 협상을 벌이고 있다"며 "법인 설립 이후 3000억위안(약 55조원) 투자를 통해 세계 3대 반도체 생산업체가 탄생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