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서처럼 최소한의 구조조정만 하고 계속 공장을 유지하게 될까. 호주에서와 같이 결국 현지 정부 자금만 당겨쓰고 완전 철수 수순을 밟게 될까. 격랑에 휩싸인 한국GM을 둘러싸고 나오는 두 갈래 시나리오다. 그런데 과연 이게 선택할 수 있는 전부일까?
▲ 배리 엥글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지난 2월20일 오전 국회를 방문 한국GM 대책 TF 위원장등 의원들과 면담전 전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 이명근 기자 qwe123@ |
미국 GM 본사가 주도적으로 연기를 피우고 있는 브라질 시나리오는 이렇다. 브라질 법인은 배리 엥글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GM International) 사장이 내세우는 구조조정 성공사례다. 브라질 정부 지원을 받아 회생에 성공한 모델이라고 한다.
GM 브라질 법인은 판매부진이 깊던 2009년 상파울루주 공장 직원 744명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지난달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한 한국GM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을 터다. '철수설' 속에 몇 년이 흐른 뒤 2014년 추가 구조조정이 대두됐지만 브라질 정부와 GM 사이 브라질 법인 회생을 전제로 합의가 이뤄졌다.
지우마 호세프 당시 브라질 대통령은 고용 유지를 조건으로 세금 감면과 대출 등의 재정 지원을 약속했고, 메리 바라 GM 회장과 브라질 법인 신차 및 신기술 개발, 공장 유지에 2018년까지 5년간 29억달러(약 3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그 결과 현재 GM은 10% 후반 점유율로 브라질 시장 1위를 지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5년 투자 약정의 일환이지만 지난달엔 오히려 상카에타 공장 생산능력을 늘리는(연 25만대→33만대) 계획까지 확정했다.
반면 호주 시나리오는 '먹튀(먹고 도망감)' 우려와 함께 흘러나온 얘기다. 호주 정부는 자동차 산업 유지를 위해 2003년부터 2014년까지 12년간 GM 호주법인(홀덴)에 22억달러(2조4000억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했다.
하지만 현지 사업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던 GM은 고비용 구조가 지속된다는 이유로 공장 폐쇄를 단행했다. 2013년 호주 정부가 지원을 더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밝힌 것이 단초이긴 했다. 호주에서는 앞서 도요타·포드·닛산도 사업을 접은 상황이었고, 결국 GM도 완전 철수했다.
GM 호주법인 생산직원만 2900여명이 실직했고, 협력업체 등 간접고용까지 따지면 약 2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작년 GM이 공장 문을 최종적으로 닫은 호주는 이제 자동차 생산이 없는 수입차 판매 시장이 됐다. GM은 스웨덴에서 사브, 독일에서 오펠도 비슷한 수순을 밟고 철수했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 지부가 2대주주 산업은행에 요구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GM의 속내는 명확해 보인다. '봐라, 브라질서 이랬잖냐. 호주처럼 되기 싫으면 한국 정부도 지원을 시원하게 내놔라'는 것이다.
한국GM이 임직원 일부를 브라질에서 열린 '글로벌 실무회의'에 파견한 것이나, 정부와 협상이 한창인 지난달 말에도 한국GM 외국인 기타 비상무이사 5명을 교체하면서 '남미통' 임원 3명을 투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하지만 브라질 모델을 장밋빛으로 받아들이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적지않다. 일단 자동차 산업 관점에서부터 한국은 브라질과 다르다.
브라질만 2억명, 남아메리카 총 4억명 인구수요를 깔고 있는 게 브라질 GM이라면 한국은 인구 5000만명, 연 내수 140만대 규모의 시장에 불과하다. 게다가 내수 80%를 차지하는 현대·기아차도 버티고 있는 한국이다.
바로 옆에 거대 중국시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상하이GM 등 다수 합자법인이 있는 상황이어서 수출기지로 활용하기도 어렵다. GM은 한국GM이 책임졌던 유럽시장에서도 셰보레 브랜드 판매를 접은 상황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국GM의 생산능력 감축은 GM의 글로벌 전략 상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다만 철수했던 다른 해외 사업장과 달리 한국GM은 자체 신차개발 등 차별화된 역량이 있어 단번에 철수하기에는 기회비용이 크다. 이게 GM으로서는 당장 아쉬운 부분일 테다.
그래서 GM의 브라질 시나리오는 정부 지원을 이끌어내 엑시트(exit)에 시간을 벌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GM이 협상 카드로 앞세우는 신차 배정도 단기간 공장유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철수 때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최대한 받아내려는 게 GM 목표로 보인다. 정부도 직간접 20만명 규모의 일자리가 아쉬운 상황이다. 당장 협력업체들은 자금이 쪼들린다며 곡소리를 내고 있다. 곧 지방선거라 민심이 돌아설까 정치권도 걱정을 보태고 있다.
▲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한국 정부와 GM 양쪽 모두에 필요한 건 결국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간, 향후 산업적·사업적공백을 메울 수 있는 비전이다. 고용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연착륙에는 최소 5~6년이 필요하다. 협력업체가 다른 판로를 확보하거나 다른 일로 옮겨갈 시간도 그만큼은 있어야 한다.
벌어낸 시간 동안 비전도 기필코 함께 찾아내도록 해야 한다. 친환경·자율주행·카셰어링 등 차 산업의 패러다임은 급격히 바뀌어가고 있다. GM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차를 포함한 자동차 산업 전반에 필요한 게 혁신이다. 그 사이 한국GM의 체질을 경쟁력있게 만들 수 있느냐에 지속가능 여부가 달렸다.
다만 GM에는 믿기 찜찜한 전력이 있다. 2013년 한국 부평공장을 찾은 당시 GM 해외사업부문 팀 리 사장은 "5년 동안 약 8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했다. 지금 보면 투자 흔적은 커녕 한국에서 구조조정과 철수 불안감만 키우고 있는 게 GM이란 얘기다.
결국 정부는 GM에 어느 정도 지원을 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GM으로부터 예측 가능한 연착륙 시간, 비전에 대한 투자를 '선언'으로 끌어내는 게 전부여선 안된다. 계약 수준으로 확정적인, 구속력 있는 중장기 사업계획을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몇 년 뒤 똑같은 혼란에 휩싸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