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접해보지 못한 일들을 겪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접하지 못한 사람들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소 제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혜택을 누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중략) 저는 사회와 임직원들에게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이병철 손자나 이건희 아들이 아닌 선대 못지않은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12월2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직접 쓴 항소심 최후진술서를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목이 메는지 물을 마셨고 진술서를 든 손이 간간이 떨렸다. “실타래가 꼬여도 너무 복잡하게 엉망으로 꼬였다”며 수감생활에서 느낀 막막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그로부터 5개월이 흐른 지난 20일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빈소에 이 부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곁을 따르는 삼성 관계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족 외에는 조문을 받지 않겠다던 구 회장의 유족들도 이 부회장의 나홀로 조문을 시작으로 정재계 인사들의 조문을 허락했다.
이를 두고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행보를 예견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했다.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를 푸는 방법으로 딱딱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낮춰 상대의 마음을 얻는 리더십을 앞세울 것이라는 예상이다. 앞서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석방 후 한달여만에 오른 해외출장길에서 캐나다 현지교민과 찍은 기념사진이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재벌가 황태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일상을 즐기는 모습으로 호감을 샀다.
삼성의 사업전략도 차츰 중심을 잡고 있다. 인공지능(AI) 분야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영국 케임브리지(현지시간 22일)를 비롯해 캐나다 토론토(24일), 러시아 모스크바(29일)에 AI연구센터를 차례로 연다. 이들 3곳이 포함되면 지난해 11월 서울 우면동에 한국 AI총괄센터를 세우고 올해 1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AI 연구센터를 설립한데 이어 삼성의 AI 거점은 5곳으로 확대된다.
AI는 수감생활로 생긴 1년여의 공백을 깨고 경영에 복귀한 이 부회장의 첫 사업이자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을 잇는 새로운 먹거리로 삼성이 점찍은 분야다. 삼성은 오는 2020년까지 AI 연구인력을 1000명 이상 확보하고 기업 인수합병에도 적극 나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AI 선두업체들을 따라잡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국내시장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 감지된다. 이 부회장은 이달초 중국의 대표적인 전기차 제조회사인 BYD를 비롯해 화웨이, 샤오미 등 내로라하는 최고경영자들을 잇달아 만나는 등 해외시장에서 접촉면을 넓히고 있지만 국내에서 활동내용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는 데다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정부의 압박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집중 조명되는 것에 삼성이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근에도 삼성증권 배당사고,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뉴 JY' 출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주식 액면분할, 무노조 탈피 등 삼성이 과거에 비해 전향적인 결정을 내놓고 있음에도 갖가지 이슈로 묻히는 측면이 있다. 아직은 이 부회장을 등장시킬 때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