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그만 일하고 좀 편하게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김우중'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김우중은 '일하는 사람'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 발을 빼면 지금까지 '김우중'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온 탑이 무너져 버리지 않을까 나는 두려워한다."
1989년 8월 발행된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김우중은 사람이 잃어버려선 안되는 것 중 첫째 가는 것으로 '이름'을 들었다.
IMF와 함께 무너져
한국경제 명암 간직
그는 "돈은 잃어버려도 괜찮은 것 중 하나"라고 했다. 다시 벌면 되고, 돈이라는 건 원래 쓰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 곧 명예는 함부로 잃어버려선 안되는 것으로 꼽았다. 그는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개인적 죽음이라면,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사회적으로 죽는 것과 다름없다"고 썼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9년 8월말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뒤이어 김우중마저 도피성 해외출국에 나서면서 30여년간 힘들게 쌓아올린 '김우중'과 '대우'라는 탑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다시 20년이 흘러 그에게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이자 IMF 위기의 장본인이라는 낙인이 함께 찍혀있다. 한국 경제사의 명암이 김우중이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대우의 첫 출발은 1967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7년간의 월급쟁이 생활을 끝내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김우중은 그의 영업능력을 눈여겨 본 직물회사(대도직물) 사장의 동업제의를 받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당시의 500만원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지금의 1억5000만원 정도다. 김우중은 자본금의 절반을 댔다.
5명으로 시작한 '대우' 출범
사랑보다 진한 일과 열정
대우라는 이름은 대도직물의 '대'와 김우중의 '우'를 따와 지었다. 서울 명동 동남도서빌딩 4층에 마련한 20여평 사무실에서 직원 5명으로 시작한 대우는 설립 한달여만에 방콕에서 첫 주문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그 해에만 58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환율이 달러당 300원 미만이던 때고, 당시에 비해 물가가 30배 뛴 것을 고려하면 요새로 치면 대략 5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이해하면 쉽다.
김우중은 스물다섯살인 1960년 먼 친척뻘인 김용순 씨가 사장으로 있는 한성실업에 들어가 무역업무를 시작했다. 일 욕심이 컸고 사업수완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을 어떻게 짜는지 직접 보려고 3개월을 공장에서 자면서 일했다. 런던에 유학 중인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싱가포르에선 37만달러어치,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기계를 다 돌려도 1년 안에 만들 수 없는 분량의 계약을 따내 도중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한국에 들어가서 주문받은 것만 넘겨주고 일이 정리되면 영국으로 다시 가려고 했어요. 그후 1주일에 한번씩 오가던 편지가 2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사람에게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신장섭, 김우중과의 대화>
일과 로맨스를 바꾼 김우중은 말 그대로 '워커홀릭(workaholic·일중독자)'이었다. "하루가 30시간이나 40시간쯤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우가 짧은 시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룬 배경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다른 회사보다 곱이상 일했다. 헌신적인 대우의 근로자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남들처럼 '아침 아홉시에서 저녁 다섯시까지(9 to 5)'가 아니라, '새벽 다섯시부터 밤 아홉시까지(5 to 9)' 일해왔다. 어느 개인이건 회사건 우리처럼 시간을 잘 활용해 열심히 일한다면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실이 없어서 천을 짜지 못할 정도로 일감이 들어오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통행금지에 걸려 직원들과 여관방에서 잠을 자던 시기가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창업 5년만에 한국에서 수출 2위 기업이 됐고 1974년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한데 이어 1978년 수출 1위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수출 1위 기업 도약
새로운 유형의 기업인
삼성·현대·LG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쌀·청과물·포목 등을 취급하는 개인상점 수준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과 달리 대우는 처음부터 주식회사로 출발해 내수보다는 수출, 곧 해외시장을 주력으로 삼아 성장했다.
김우중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혁신과 파괴를 일으킨 현대적 의미의 기업가에 한층 가까웠던 인물이다. 그는 경기중-경기고-연세대 등 정규교육을 마치고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스스로도 자신을 다른 창업자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사실 옛날부터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아주 천하게 봤고, 일제시대 때는 머리 좋은 사람은 의사나 선생 같은 쪽으로 빠졌고, 해방 후도 마찬가지로 우수한 사람들이 기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겁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국제적으로 이야기하는 기업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은 우리나라도 10년 정도가 아닌가 봅니다.(중략)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할 것이냐, 사실상 전문경영자가 되고 싶지 기업주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김우중, 나의 시대 나의 삶 나의 생각>
1977년 1월 동아방송 신년 특별대담에서 김우중이 한 얘기다. 10년 전인 1967년 문을 연 대우가 국내 기업사의 분기점이었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성취감이 그를 일중독자처럼 뛰어다니게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김우중은 "기업을 경영해 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이 주는 기쁨은 그까짓 재산이 늘어나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아프리카 수단부터
마지막 시장 북한까지
대우라는 이름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닌다. 세계시장을 개척할 때도 마찬가지다. 1975년 종합무역상사 시대가 열리자 대우는 수단과 나이지리아,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했고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뤄지기 7년전 중국에 들어가 1987년 이미 한국기업 최초로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김우중은 노태우 정부 때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가교역할을 했다. 1992년 1월 북한을 공식 방문하고 돌아온 김우중의 얘기다.
"압록강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까 다리가 두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부서져 복구가 안된 상태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가보고 싶었던 마지막 남은 시장이 여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실경영과 기획해체설
"흔적 남긴 것에 고마움"
1998년 대우그룹에 사망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다면 김우중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지금도 대우 몰락의 원인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한쪽은 세계경영 속 무리한 투자와 과다한 부채가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경제관료에 의해 기획해체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IMF 시절 금융감독위원장으로서 구조조정의 악역을 맡았던 이헌재는 김우중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을 누비면서 본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 두려움뿐이랴. 한계도 없고 사고방식도 독특했다."<이헌재, 위기를 쏘다>
이헌재는 1982년부터 1년 반동안 대우 전략담당 상무로 재직하며 김우중과 함께 세계경영 현장을 직접 둘러본 이력이 있다. 어제의 인연이 오늘의 악연으로 끝맺은 것이랄까. 김우중은 자신의 삶을 '흔적'에 비유했다.
"그저 고맙게 생각해요. 평생동안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 남자로 태어나서 여한이 없을 만큼 할 것 다 해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남기는데 (나는) 흔적이라도 남겼으니 말이에요."
김우중은 한국 경제사에 깊은 흔적을 새기고 2019년 12월9일 영면했다. 그의 이름은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김우중 약력
1936년 경북 대구 출생
195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0년 연세대 경제학 졸업, 한성실업 입사
1967년 대우실업주식회사 설립
1973년 동양증권(대우증권의 전신) 인수
1974년 내쇼날의류, 대우전자로 전환
1976년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의 전신) 인수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의 전신) 옥포조선소 인수
1983년 대우자동차 출범
1984년 대우경제연구소 설립
1992년 북한 공식방문
1993년 세계경영 선포
1997년 한국 IMF 구제금융 신청
1998년 단기자금·회사채 발행한도 제한
1999년 대우-삼성 빅딜 결렬, 워크아웃 신청, 김우중 출국
2002년 GM, 대우자동차 인수
2005년 김우중 귀국
2006년 징역 8년6개월, 추징금 17조9253억원
2008년 특별사면
2019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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