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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20대]경계인(境界人) 신격호

  • 2019.12.23(월) 13:10

배고픔 안고 일본행…韓日 양국에 뿌리
한국에 자본 공급 역할…여러 오해들
일에서 행복 느낀 기업인…말년의 그늘

배가 고프니까 먹을 것밖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디다. 어떻게 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리만 하게 되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거지요.
<월간조선, 2001년 신년호 특별 인터뷰 中>

1942년 만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격호가 마주한 현실은 배고픔이었다. 수중에 면서기 두달치 월급인 83엔을 갖고 있었지만 단신으로 객지생활을 해야하는 입장에서 함부로 꺼내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친구집에 반년을 얹혀 살았고 우유배달, 신문팔이, 허드렛일로 생활비를 벌었다.

신격호가 일본으로 간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일수도 있고, 무언가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수몰된 고향인 울산 둔기마을에 부모님과 동생들, 아내를 두고 훌쩍 떠났다.

처음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구입한 문학서적에 빠져 작가의 길을 걸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롯데라는 사명도 독일 문학가 괴테가 쓴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샤롯데)에서 따왔다.

신격호는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가 사업을 일군 뒤 1960년대 한국으로 돌아와 고국투자를 본격화했다. 사진 왼쪽은 일본 롯데 창업 초기의 신격호 모습.

이상과 현실의 간격은 컸다. 문학도를 지망하던 고학생은 진로를 응용화학으로 바꾼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이공계 학생에 대해선 징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뒤따랐다. <롯데제과 20년사>는 "아무래도 문학에 경도되어서는 자신의 학업은 물론이거니와 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신격호는 와세다실업학교를 거쳐 와세다고등공업학교를 다녔다. 꿈은 포기했지만 이 때 배운 지식이 사업의 기틀을 다질 때 큰 도움이 됐으니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할까.

단신으로 일본행
문학 꿈꾼 20대 청년
첫사업, 폭격으로 전소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자금을 대주겠다는 권유를 받고 차린 선반용 오일 제조공장이 B-29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인파 속에서도 신격호는 사업빚을 갚겠다며 일본에 남아 재기를 노렸다. 허물어진 군수공장의 기숙사 자리에서 비누와 포마드 등을 만들어 팔아 1년도 안돼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워낙 물자가 부족하던 때다.

만약 신격호가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화학이 아닌 문학을 택했다면? 한국과 일본에 롯데 제국을 세워 경계인의 삶을 산 그에게 인생은 선택이었고, 적어도 사업 면에선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롯데는 1948년 도쿄에서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으로 출발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신격호는 풍선껌을 만들어 대박을 냈다. 당시 일본에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껌 제조업체 약 400개가 난립했다. 그런데도 신격호의 껌이 일본시장을 장악한 건 품질에 대한 고집과 과감한 마케팅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격호는 화학제품인 초산비닐수지 대신 남미산 천연수지를 사용해 껌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원료를 구하기 어려워 초산비닐수지를 썼지만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 덕에 구멍가게 주인들이 공장 앞에서 물건을 받아가려고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 풍선껌에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해 풍선을 부는 재미를 주고, 미스롯데를 선발해 무개차에 태워 도쿄 시내를 누비게 하는 등 여러 이벤트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960년에는 껌 구입시 1000만엔을 받아갈 수 있는 추첨권 제공 행사를 벌여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그 무렵 일본의 월평균 가계 수입이 2만5000엔 남짓이던 때다. 나중에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과다한 경품제공을 금지하는 조치에 나설 정도였으니 당시 롯데가 일으킨 반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행사로 롯데의 매출은 두 배로 뛰었고 껌 시장에서 부동의 1위로 올라섰다.

신격호(왼쪽에서 두번째) 부부와 두 아들(동주·동빈)과 찍은 사진

신격호가 한국 투자를 공식적으로 시작한 건 1967년이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불혹(不惑)을 훌쩍 넘겨 돌아왔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자본금 3000만원, 직원 500명으로 롯데제과를 세웠다. 그 전에 동생 신철호와 신춘호를 통해 주식회사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세웠으나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기 전이라 본격적인 투자로 보기는 어렵다.

원래 한국에서는 정유화학과 제철업을 하고 싶었다. 1966년 정부가 진행한 제2정유공장(현재의 GS칼텍스) 사업자 선정에 참여했다가 락희(現 LG)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나중에 대림산업과 함께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아쉬움을 달랬지만 제철업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일본 안에서 롯데그룹이 일으킨 여러가지 산업 분야에서는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낙후한 한국의 산업에 이바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중화학공업이 우선 순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중략) 그러나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롯데그룹은 제철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부 쪽의 명분은 제철업만은 국영으로 한다는 것이었고 민간기업으로서는 곤란하다고 했습니다."<롯데제과 20년사>

품질·마케팅으로 日석권
韓 정유화학·제철업 꿈꿔
초고층의 꿈 "조국에 남기려"

이 시기 정부가 롯데에 제철업을 맡겼다면 지금의 포스코는 롯데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했다. 신격호로선 자존심 상할 만한 언급이다.

"장 장관(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을 의미)은 또 재일교포인 롯데재벌의 신격호 씨가 일본의 삼릉상사(미츠비시의 한자표기)와 제휴, 60만톤의 제철공장건설을 위한 8700만불의 차관신청서를 제출한데 대해 다만 '참고로 받는다'고 가볍게 넘기면서 재일교포에게는 중후판공장 정도를 맡길 생각이라고만 말했다."<동아일보, 1967년 7월26일>

서울 잠실에 123층 높이로 건설된 롯데월드타워는 신격호의 꿈이 깃든 건물이다.

서울 잠실에 초고층 건물을 세우려 한 것도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롯데월드타워는 1987년 부지매입부터 2016년 최종 완공까지 약 30년 동안 끊임 없이 특혜의혹에 시달렸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아파트를 짓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신격호는 한국에 기념비적인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21세기 첨단산업중 하나가 관광입니다. 그러나 한국엔 구경거리가 별로 없어요.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시설을 조국에 남기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놀이시설도, 호텔도 제대로 한번 세울 것입니다."<경향신문, 1995년 10월4일>

롯데가 201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전까지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던 호텔롯데도 한국으로 돈이 들어오는 입구였지 빠져나가는 출구는 아니었다. 호텔롯데는 1973년부터 수십번의 유상증자를 통해 한국에 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 주주에게 배당을 시작한 건 2005년부터다.

일본 롯데 직원들도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격호의 장남 신동주는 2017년 8월 <나의 아버지 신격호>라는 책을 내려고 했다. 돌연 출판이 중단됐지만 책에는 일본 롯데의 이익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출판사가 배포한 보도자료에 담겨있는 내용이다. 신격호는 직원들의 항의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롯데의 모체는 일본에 있다. 그러나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은 기업가의 의무다. 안과 밖을 구별하여 회수를 서두르는 것은, 섬나라 근성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인스러운 발상 아닌가. 지금의 일본의 상태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리도 없고, 장래에는 일본 롯데가 도움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신격호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에서 먼저 뿌리를 내렸기에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오해를 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2001년 1월 <월간조선>에 실린 내용이다.

-신 회장께선 일본 이름이 시게미츠 다케오(重光武雄)이신데 언제 일본으로 귀화하셨습니까.
"귀화라니 나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적이 없어요. 일제시대 창씨개명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오. 난 언제나 한국인이었어."

-그렇습니까. 아니, 그런데 왜 해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시중에선 모두 그렇게 믿고 있는데….
"그런 데 일일이 신경을 쓰면 뭣하오. 자연히 바로잡혀질 텐데."

신격호는 그의 부인 시게미츠 하츠코가 A급 전범인 시게미츠 마모루의 조카라는 루머에도 상당기간 시달렸다. 롯데에 따르면 시게미츠 하츠코의 결혼전 성은 '다케모리'이며, 시게미츠라는 성은 결혼 후 신격호의 일본식 성을 따른 것이다. 시게미츠 마모루와는 관련이 없다는 설명이다.

오후 3시면 임원들로부터 어김없이 보고를 받고 한밤 중이나 새벽에도 호텔과 백화점 등을 돌며 현장을 둘러보던 신격호에게 사업은 그의 전부였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나는 아직 10년, 20년을 일할 생각"이라며 애착을 드러냈다.

어쩌면 그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자신의 건재를 믿고 자리에서 내려올 시기를 놓친 게 결국엔 2015년 두 아들간 경영권 다툼으로 번졌다. 신격호는 일본 롯데에서 해임됐고 한국에서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체계적인 승계 플랜을 마련해놓지 않았던 게 깊은 상처를 남긴 셈이다.

"일을 할 때 정열이 솟는 사람은 그 일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정열은 상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즐겁게 이겨낼 수 있지만, 정열이 없으면 어떠한 좋은 조건이라도 결코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천하의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일에 정열이 솟는 사람이요,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 일에 정열이 솟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한국경제신문 1983년 6월26일>

외부에는 좀처럼 자신의 경영관을 드러내지 않던 신격호가 한 경제신문에 기고한 칼럼 중 일부다. 정열은 신격호가 1980년 그룹훈(訓)으로 제시한 세가지 덕목(정직·봉사·정열) 중 하나다. 그의 퇴장은 가슴 속 정열이란 불덩이를 안고 살아온 한 시대 기업인의 퇴장을 의미한다. 말년 그와 가족들에게 덮친 사건들만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올해 만 97세인 신격호는 건강악화로 현재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신격호 약력

1922년 울산 출생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감
1948년 일본 롯데 설립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1973년 호텔롯데 설립
1979년 호남석유화학 인수, 롯데쇼핑 출범
1981년 롯데물산 설립
1982년 롯데자이언츠 설립
1994년 코리아세븐 인수
2006년 롯데쇼핑 기업공개, 우리홈쇼핑 인수
2015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해임
2016년 횡령 배임 혐의로 기소
2017년 롯데그룹 지주회사 전환
2019년 징역3년·벌금 30억원 확정, 형집행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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