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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 신격호]①문학청년, 껌을 팔다

  • 2020.01.20(월) 11:22

빈농 자식으로 태어난 문학청년…20세에 도일
일본서 홀로 고군분투…롯데그룹 기반 일궈내

국내 대기업 마지막 창업 1세대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문학청년이던 그는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궜다. 껌으로 시작해 식품, 유통, 화학, 건설, 제조, 금융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양국 경제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하지만 그는 늘 경계인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큰 업적을 이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어느 곳에도 깊게 뿌리박지 못했다. 비즈니스워치는 약 한 세기에 가까웠던 경계인 신격호의 삶을 시기별로 재조명하고 그가 남긴 업적과 숙제 등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문학 청년이었다. 빈농(貧農) 가정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난 그에게 책은 사치였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했다. '입에 풀칠'하는 것이 책보다 더 중요했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그의 어린 시절 꿈은 모두 글과 관련된 일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부친의 교육열이 높았던 점이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한 시절이었음에도 신 명예회장의 부친은 맏이의 공부를 적극 지원했다. 그 덕에 신 명예회장은 소학교와 울산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문학으로 이끌지 않았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경남도립 종축장에서 돼지를 키우는 기사로 일했다.

꿈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는 결국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집안을 일으키고 동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더 '큰일'을 하고 싶었다.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일본행 관부 연락선에 홀로 몸을 실었던 이유다. 수중에는 사촌 형이 마련해준 노잣돈 83엔이 전부였다. 당시 면서기 두 달 치 월급이었다. 나름 큰돈이었다. 홀로 객지 생활을 해야 하는 그에게 83엔은 830만 엔보다도 무거웠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우유배달, 신문 판매 등 허드렛일로 겨우 연명했다. 이대로라면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그가 꿨던 큰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낮에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을 다녔다. 우유배달 등으로 번 돈은 이를 악물고 모았다. 오로지 성실함으로 버텼다.

일본 롯데시절 신격호 명예회장의 모습. (사진제공=롯데그룹)

암담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된 것은 이런 성실함이 인정받으면서부터다. 신 명예회장을 유심히 지켜보던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는 그에게 사업 자금 5만 엔을 빌려줬다. 단 한 번도 우유배달 시간이 늦은 적이 없었던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터였다. 신 명예회장의 성실함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하나미쓰의 지원은 신 명예회장에게 천군만마였다. 사업 자금을 마련한 그는 도쿄 근처에 선반용 오일 제작공장을 열었다. 학업과 사업을 동시에 진행한 셈이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패전 위기에 몰려있었다. 미군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신 명예회장이 세운 공장도 위태로웠다.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됐다. 그의 공장은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일순간에 전 재산을 날렸다.

신 명예회장은 막막했다. 빌린 돈으로 지은 공장이 가동조차 못한 채 불에 탔으니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게 된 신 명예회장은 절치부심했다. 더 이상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해방이 되고 사람들이 일본을 떠날 때도 그는 남았다. 그에게 사업 자금을 빌려준 하나미쓰에게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신 명예회장이 일평생 '신뢰'를 강조했던 것도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시 허드렛일 전선에 나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종류의 일뿐이었다, 막노동과 우유배달로 재기를 위한 밑천 만들기에 전력투구했다. 어렵사리 돈이 모였고 이번에는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열었다. 비누와 포마드 등을 제조해 판매했다. 전후 생필품이 부족했던 일본인들을 겨냥했다.

그의 전략은 통했다.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의 비누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 덕에 신 명예회장은 하나미쓰에게 빌린 돈 5만 엔을 1년 반 만에 모두 갚았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만 엔이라는 거금을 빌려주고도 자신을 믿고 기대려준 히나미쓰에게 빌린 돈 상환은 물론 집 한 채까지 선물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성실함과 상대에 대한 신뢰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비누와 포마드로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다. 1948년 그는 자본금 100만 엔, 종업원 10명으로 껌 회사인 ㈜롯데를 창업했다. '롯데'라는 사명에는 그의 못다 한 꿈이 담겨있다. 그가 탐독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 부프(Charlotte Buff)'에서 따왔다. 소설 속 샤롯데는 만인에게 사랑받는 정열의 상징이다. 만인에게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염원이 담겨있다.

신 명예회장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롯데라는 이름이 떠올랐을 때 충격과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정열은 롯데그룹의 사훈(社訓)에도 명시돼있다. 신 명예회장이 '롯데'라는 사명에 애착을 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못다 이룬 문학의 꿈에 대한 아쉬움을 사명에 담아낸 셈이다. 그리고 이후 그는 롯데를 재계 서열 5위의 대기업으로 키우면서 그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일했다. 정열은 그를 지탱한 힘이었다.

롯데 껌은 일본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침 미군이 주둔하면서 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신 명예회장은 다른 일본 껌 제조업체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본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껌 제조업체가 난립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신 명예회장은 '롯데 껌'만의 장점을 부각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965년 신격호 명예회장의 입국 모습. (사진 제공=롯데그룹)

롯데 껌은 껌 제조 시 경쟁사들이 흔히 사용하던 화학제품인 초산비닐수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남미산 천연수지를 사용해 차별화를 뒀다. 이를 통해 껌 품질을 업그레이드한 전략이 주효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 껌의 저변 확대를 위해 마케팅도 적극 활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1960년에 진행했던 껌 구입 시 1000만 엔을 받아 갈 수 있는 추첨권 행사다.

롯데의 이런 마케팅 전략은 일본 전역을 열광하게 했다. 너도나도 롯데 껌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 훗날 일본 정부가 과다 경품 제공이라는 이유로 금지 조치를 내릴 만큼 롯데 껌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본인들에게 '롯데'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롯데는 이를 바탕으로 일본 껌 시장에서 1위 자리에 올랐다. 신 명예회장의 의도가 제대로 적중했다.

신 명예회장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껌 시장에서의 돌풍을 발판 삼아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초콜릿, 캔디, 비스킷 등으로 진출해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 제과회사로 키웠다. 아울러 1959년에는 롯데상사를 설립한데 이어 롯데부동산(1961년), 롯데아도(1967년), 롯데물산(1968년), ㈜훼밀리(1968년)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성공했다. 이를 토대로 롯데는 일본 10대 기업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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