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방문한 필리핀 마닐라의 한 대형마트에서 반가운 초록색 병을 만났다. 한글로 적힌 브랜드명까지 영락없는 한국 소주였다. 많고 많은 소주 중에서 유독 가격도 저렴했다. 그런데 무심코 집어 든 이 제품의 뒷면을 살펴보니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니었다. 그렇다. '로컬(현지)' 소주였다.
한국 소주가 '짝퉁(모조품)'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류 열풍에 따라 K소주의 위상이 높아지자, 이를 비슷하게 따라 한 상품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어서다. 판을 치는 위조품 탓에 자칫 현지 소비자들이 한국 소주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어, 여기에도 있었네?"
10년 전만 하더라도 필리핀에서 한국 소주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술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현지 식당이나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에 일부 소주 제품을 들여 놓는 게 전부였다. 현지인을 위해서라기보다 한국인이 찾기 때문에 있어야 했던 술이었다.

이랬던 필리핀 시장에 K소주가 본격적으로 수출된 건 2016년부터다. 하이트진로의 '에이슬'을 시작으로 롯데칠성음료 '순하리', 무학 '좋은데이' 등 과일향 리큐르가 그 중심이 됐다. 우리나라와 달리 소주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은 만큼 알코올 도수가 낮고, 과일 맛이 나는 소주로 진입장벽을 최소화해 소비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인 시장 위주에서 현지 대형 유통 채널로의 다변화도 꾀했다. 현지인 중심 창고형 할인마트인 퓨어골드와 S&R, 고급 쇼핑몰 SM몰부터 수천 개에 달하는 세븐일레븐에도 입점해 접점을 확대했다. 이를 통해 현지 소비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K소주를 만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뛰어난 접근성을 갖추게 된 K소주는 한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 됐다. 하이트진로의 경우 2016년 이후 필리핀 시장 내 소주 수출량이 연평균 20~40%대를 유지했다. 롯데칠성의 순하리 역시 2018년부터 매출 증가율이 꾸준히 두 자릿 수를 기록했다.
이 덕분에 필리핀으로의 한국 소주 수출도 안정세에 접어든 추세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필리핀으로 수출된 우리나라 소주 규모는 700만달러(약 95억7460만원)다. 95개 수출국 중 일본과 미국, 중국, 베트남에 이은 5위다.똑같은데 더 싸다
문제는 한국 소주가 필리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이를 모방한 카피 제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엠페라도르의 '행복한' 소주가 대표적이다. 엠페라도르는 브랜디부터 와인, 위스키 등을 제조하는 필리핀 거대 주류 회사다. 2020년 '자몽에 이슬'과 유사한 자몽 맛을 내놓은 이후 현재는 청포도 맛과 레귤러(일반)까지 3종의 소주를 판매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전체로 넓히면 모방품은 더 많다. 베트남과 태국 등 다른 동남아 국가 다수에서도 유사 소주는 시중 마트에서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 '태양', '건배', '선물' 등 제품명이 한국어로 적혀있는 건 물론 360㎖의 초록색 소주병 등 한국 소주의 구색을 대부분 갖췄다.
여기에 한국 소주보다 가격은 저렴하다. 현지에서 직접 소주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설명이다. 일례로 엠페라도르의 행복한 소주는 필리핀 한 대형마트에서 70페소(1729원)에 판매되고 있다. 다만 한국 소주의 가격은 100페소(2471원)를 훌쩍 넘어선다.
업계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현지 기업들이 한류 열풍에 편승하기 위한 행보로 보고 있다. 동남아는 일상 속에서 한류에 대한 소비가 많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K드라마와 K콘텐츠 영향에 따라 K푸드를 넘어 K소주를 접하기 시작한 젊은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각에선 소비자 혼란이 가중되는 만큼 한국 소주의 일부 수요를 로컬 소주에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제품 뚜껑에 붙은 납세 필증 라벨지, 뒷면 제조사 확인 등으로 구분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인 외형이 비슷해 눈여겨보지 않는 이상 판별하기 쉽지 않다. 특히 로컬 소주의 가격이 한국 소주 대비 훨씬 저렴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업계는 현재까지 유사 소주에 대한 영향이 크진 않다는 입장이다. 안정적인 수출을 통한 매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여기에 최근에는 로컬 소주와의 가격 경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현지 공장 설립에도 나서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하이트진로는 내년 11월 시운전을 목표로 베트남 생산기지를 짓고 있다. 매년 증가하는 수입 주류 관세에 따라 원가를 절감하고, 소주에 대한 소비자들의 가격 민감도를 낮추기 위한 취지라는 설명이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K소주는 동남아에서 탄탄한 유통망을 갖추고 있다"며 "현지 저가 소주 브랜드들이 후발주자로 들어오더라도 낮은 가격 정책만 가지고는 파이를 뺏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