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교체
이번 달은 삼양식품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달입니다. 우선 지난달 말을 기준으로 불닭볶음면의 누적 판매량이 100억개를 돌파했습니다. 그저 오래 팔려서 쌓은 누적 판매량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죠. 당장 지난해에만 20억개가 팔렸습니다.
판매 속도는 매년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10억개 돌파가 출시 5년 만인 2017년이었는데, 거기서부터 5년 뒤인 2022년엔 40억개를 돌파했고요. 3년 만인 2025년엔 90억개를 넘어섰습니다. 여기에서 10억개가 추가되는 데는 반 년이면 충분했습니다. 아마 2~3년 뒤면 200억개 돌파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100억개 판매가 삼양식품과 불닭볶음면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이정표였다면, '페포'의 등장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상징하는 이정표입니다. 삼양식품은 이달부터 불닭볶음면에 사용되는 캐릭터를 론칭 때부터 함께 해 왔던 '호치'에서 '페포'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호치는 불닭볶음면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2015년부터 마스코트로 활용됐습니다. 중국 등에서 불닭볶음면을 따라한 유사 제품들이 난립할 때 '호치' 캐릭터까지 베껴올 만큼 불닭볶음면을 대표하는 캐릭터였죠. 그런 호치가 물러난다는 소식이 나오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무리한 세대 교체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페포가 뭔데
페포는 삼양식품의 자회사인 삼양애니가 2024년 첫 선을 보인 캐릭터인데요. '암탉'인 호치가 낳은 알에서 태어난 병아리입니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머리 위의 불꽃 심장이 반응하는데요. 기존 호치도 매운 맛에 따라 불을 뿜는 정도가 달라졌었지만 페포의 경우 표정과 몸짓까지 더해져 '맵기 지표'로서의 역할이 더 강화될 전망입니다.
페포는 우리에겐 낯선 캐릭터지만 해외에선 '빌드업'을 착실히 해왔습니다. 페포가 주인공인 유튜브 채널은 현재 구독자가 106만명에 달합니다. 미국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쇼츠들은 조회수가 1000만회가 넘는 영상이 수두룩합니다. 780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쇼츠도 있습니다. 그에 걸맞게 페포는 '숏폼을 즐기는 캐릭터'라는 설정도 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 역시 호치와 궤를 달리합니다. 호치가 다소 투박하고 B급 감성이 묻어나는 캐릭터라면 페포는 좀 더 단순한 외형에 불닭볶음면의 매운 맛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붉은 색으로 디자인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호치보다 '미국풍' 캐릭터라는 느낌도 들고요.
정식 데뷔 후의 성과도 나쁘지 않습니다. 삼양식품은 지난 2월 인기 보이그룹 보이넥스트도어와 함께 전세계 젠지 세대를 타깃으로 한 신규 글로벌 캠페인 'Hotter than my EX'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는데요. 페포가 불닭 세계관에 본격 합류한 첫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이 영상은 2개월 만에 조회수 1억뷰를 돌파했습니다.
IP사업
페포가 호치보다 귀엽냐 아니냐는 개인의 취향으로 돌리더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잘 나가던 불닭볶음면에 괜히 불확실한 요소를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10년 넘게 불닭의 마스코트로 활동해 온 호치 대신 페포를 내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삼양식품은 지난 2023년 비전 선포식에서 그룹의 양대 축으로 푸드케어와 '이터테인먼트(Eat+Enertainment)'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삼양식품의 제품과 IP를 활용해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생산, 식품 기업을 넘어 '콘텐츠 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오너 3세인 전병우 본부장이 이 사업의 핵심인 '삼양애니' 대표에 부임할 만큼 기대가 큰 사업이었죠.
문제는 불닭볶음면의 기존 마스코트인 호치가 '이중계약' 신세라는 점입니다. 식품 사업권은 삼양식품이 갖고 있지만 비식품 사업권은 캐릭터를 제작한 외부 업체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치로 식품 외 사업을 하려면 여러 계약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죠. 발이 묶인 셈입니다. 결국 삼양애니는 2024년 자체 개발 캐릭터 '페포'를 내놓습니다.
삼양식품은 페포의 공식 사이트인 '페포월드닷컴'을 통해 오는 8월부터 인형과 키링, 쿠션 등의 굿즈 판매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IP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도 준비 중입니다. 최근엔 '불닭(Buldak)'의 상표권 등록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라면 외 시장에서도 '불닭 열풍'을 불러일으키겠다는 목표입니다.
단순히 제품 패키지에 그려진 캐릭터를 교체하는 줄 알았던 호치와 페포의 세대교체가 사실은 그룹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다니 재미있죠. 호치가 12년간 다져 온 불닭볶음면의 기반 위에서 시작될 페포의 12년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2038년에는 삼양식품이 '라면 제조사'가 아닌 '캐릭터 기업'이 돼 있을까요. 궁금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