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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20대]이병철, 아프니까 청춘이다

  • 2019.11.20(수) 11:14

식민지 젊은이의 고뇌…빈곤 해결 위해 사업 결심
단숨에 200만평 부자로…찰라 같은 성공과 실패
실패해도 빠른 재기 "인생엔 낭비없어…10년후 달려"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움에 직면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안돼 속이 타들어간다. 기업들은 실적악화를 걱정한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한국 경제의 신화를 쓴 재계 거인들의 젊은 시절, 특히 삶의 항로를 결정하는 20대 젊은날, 이들은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조명해본다.[편집자]

삼성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은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뒤 2~3년간 방황을 했다. 그는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무엇인가 생각이 여물고, 결국에는 사업을 일으켜야 된다는 뜻을 갖게 된 시기"라고 회고했다.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일본 유학을 중간에 관두고 불쑥 고향으로 돌아온 이병철에게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일을 찾지 못해 시간을 흘려보내는 나날이 계속됐다. 돼지와 닭을 키우고 채소도 길렀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친구들과 한밤중까지 골패를 하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운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했던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20대 초반의 삶을 "실의에 빠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전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에게도 20대는 아픔의 시기였다. 할아버지 때 천석지기의 부를 일군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했지만, 그렇기에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방황했다.

이병철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12세 때 다닌 서울 수송보통학교에서 반 석차가 50명중 35~40등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수(數)에 대한 감각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이병철의 언론기고문 등을 보면 유독 숫자를 언급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이병철도 회고록에서 "산술(수학)만은 늘 학급에서 상위여서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1980년대 초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팀장을 지낸 고(故) 정준명 씨는 2010년 2월 <중앙일보>에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병철을 추모하는 기고를 했다. 이런 대목을 썼다.

"댁의 생활비, 공사 간의 개인적 지출 명세를 매달 찾아 점검하고 지난달보다 지출이 많은 달은 반드시 언급을 해서 바로잡았다."

생활비를 챙기는 재벌? 이 어색한 조합에서 이병철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삼성의 성공비결을 '시스템 경영'에서 찾는다면, 이를 정착시킨 건 이병철의 꼼꼼함 아니었을까. 이병철은 대단한 메모광이기도 했다. 해야할 일, 만날 사람, 전화해야 할 곳 등을 메모지에 적어놓고 정해진 일정을 소화했다.

이병철이 사업을 결심(1934년)한 건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있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마르크스와 엥겔스 문헌을 읽고 시위에도 참가해 이틀간 유치장 생활도 했지만 사회운동이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용기가 나진 않았다. 그렇다고 식민지 착취의 첨병역할을 하는 관리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회색'에 비유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사업이다.

당시엔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대거 전락하고 공장에선 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에서 생산한 쌀과 곡식은 절반 넘게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한 개인이 제아무리 부유해도 사회 전체가 빈곤하다면 그 개인의 행복은 보장받지 못한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사업이며…."<호암자전>

사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병철이 내놓은 답이다. 20대 때만 해도 어렴풋한 생각이 8·15 해방, 6·25 전쟁, 5·16 군사쿠데타 등 한국사회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더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돈을 벌기에 앞서 왜 버는가를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1980년 8월 <서울경제신문>에 실린 인터뷰다.

"자기만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국가와 사회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기업이 있는 것이다. 국가관, 사회관이 없는 사람은 기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 매점매석을 하는 장사꾼, 투기를 일삼는 사람, 사기행각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업가가 될 수 있겠는가?"

이병철의 성공에는 운(運)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일본 유학시절 생활비를 꼬박꼬박 집에서 받았고, 사업을 시작할 때도 부친이 준 300석 규모의 재산이 종잣돈이 됐다. 요새 말로 '부모 찬스' 덕을 봤다. 하지만 그걸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누구보다 빨리 성공했고 누구보다 빨리 망했다. 그러고는 툭툭 털고 일어섰다.

1938년 대구에 문을 연 삼성상회 전경. 오늘날 삼성의 싹이 된 곳이다./출처=호암재단

이병철의 첫 사업은 정미소다. 지인 2명과 함께 마산에서 '협동정미소'(1936년)를 차렸다. 경남 일대의 농산물이 모이던 곳이라 장사가 잘됐다. 이 무렵 오늘날의 주식이나 비트코인이라 할 수 있는 '미두거래(미래의 일정시점에 특정가격으로 곡물을 사고 파는 거래)'에 손을 댔는데 첫해 자본금의 3분의 2를 날렸다. 다행히 이듬해 원금을 회복하고 이익을 남겼으나 이 일로 동업자와 관계에 금이 갔다.

이병철은 정미소 곡식을 실어나를 화물운수업에도 진출해 성공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트럭 회사를 인수해 궤도에 올려 놓았다. 젊은 나이에, 그것도 첫 사업이랄 수 있는 정미소와 운수업에서 '대박'을 낸 그의 다음 행보는 땅이었다.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에서 돈을 빌려 김해평야 일대의 땅을 사들여 그의 나이 27세(1937년)에 200만평을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땅매입 대금 대부분이 은행에서 나왔다.

<호암자전>에는 은행 금고를 개인 금고로 착각할 정도로 기고만장했던 시기라고 당시를 표현했다. 훗날 이병철이 말한 기업인의 잣대를 들이대면, 손쉬운 돈벌이 빠진 20대의 이병철은 기업인으로서 낙제점이었는지 모른다.

행운 뒤에는 불행이 따른다. 이병철도 예외는 아니다. 성공에 취해 들떠있던 그해(1937년) 여름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통보가 그에게 날아왔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비상조치의 일환으로 은행 대출 중단조치를 발표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의 돈으로 부동산을 산 사람에게 대출규제는 치명적 조치다. 땅값은 폭락하고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일대혼란이 벌어졌다.

이병철은 전답을 헐값에 팔고 정미소와 트럭회사를 정리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것이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교훈을 깨달았다고 한다.

눈여겨볼 부분은 그 뒤의 행보다. 마산 사업을 정리한 이병철은 두달간 부산·평양·신의주·원산·흥남부터 중국 베이징·칭다오·상하이 등을 둘러봤다. 실패 자체에 허우적대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새로운 사업 모색에 나선 것이다. 그러고는 반년 뒤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38년 3월1일의 일이다. 지금의 삼성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누구나 똑같은 결말을 맺지는 않는다. 이병철에게는 사업 실패보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방황하던 그 시기가 괴롭지만 가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단 뜻을 세운 이상 실패는 장애물일 뿐 넘지못할 벽은 아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중략)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소중한 체험으로 살려가느냐에 있다."

▲이병철 약력

1910년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출생
1922년 지수보통학교/수송공립보통학교
1926년 중동중학교 입학
1929년 일본 유학
1930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입학
1931년 신병(身病)으로 학업중단하고 귀향
1934년 사업투신 결심. 부친에게서 논 300석 규모의 사업자금 받음
1936년 마산 협동정미소 창업/마산 일출자동차회사 인수
1937년 토지사업 확장. 중일전쟁으로 사업청산
1938년 삼성상회 설립
1939년 조선양조 인수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
1953년 제일제당 설립
1954년 제일모직 설립
1963년 동방생명, 동화화백화점, 동남증권 인수
1964년 한국비료 설립
1965년 중앙일보사 설립
1967년 세한제지 인수
1969년 삼성전자 설립
1974년 삼성중공업 설립
1977년 한국반도체 인수
1980년 한국전자통신 인수
1987년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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