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이 글로벌 반도체·완성차 기업과 오는 12일(이하 현지시간) 회의를 한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회의를 여는 의도 역시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백악관은 기업들이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해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일자리도 늘려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한 인센티브와 법인세 인상 등 당근과 채찍을 모두 활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하는 기업 명단은 아직까지도 공개를 하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외신들은 이 회의에 참석할 국내 기업으로 삼성전자를 유력하게 거론하고 있으나, 회사 측은 이같은 소식이 나온지 일주일이 되도록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경영상으로도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 "회의는 합니다. 누가 오는지는 나중에…"
젠 사키(Jen Psaki)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5일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오는 12일 백악관 고위 관료들이 반도체 관련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회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사키 대변인은 회의에 참석하는 기업 명단을 묻는 질문에 회의일에 임박해 확정된 명단을 확인해주겠다고 했다. 중요한 민·관 회의가 열리기 전에 참석자를 비공개하는 경우가 흔하나, 현재까진 참석 기업이 완전히 확정되진 않았다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처럼 보안이 관리되는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백악관의 브리핑과 맞물려 미국 언론에 기업 명단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일 블룸버그통신은 하루 전 백악관 브리핑 이후 삼성전자, GM, 글로벌파운드리가 회의에 참석한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6일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가 화상 회의 방식으로 참석한다고 이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백악관 브리핑에서 해당 사안이 언급된 이후 참석 기업과 인물, 회의 방식이 조금씩 알려졌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들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조금씩 흘려서 반응을 살피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사키 대변인은 오는 16일 미국에서 열릴 예정인 미·일 정상 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반도체 공급망 관련 논의도 할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이런 까닭에 미국 정부의 글로벌 반도체·완성차 기업 소집이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더 가깝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강화하고 있다. 점점 커지는 중국 반도체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기업들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수입한 반도체 장비의 국가별 점유율(GTA·Global Trade Atlas 분석)을 보면 중국은 2018년 6.1%에서 지난해 13%로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는 한국이 29.5%로 1위이나, 2018년(34.2%) 대비 소폭 감소했고, 2위인 대만은 18.2%로 2년 전과 같은 수준이다. 일본은 같은 기간 9.3%에서 4.5%로 반토막이 됐다. 게다가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80% 이상이 삼성전자, 대만 TSMC, 중국 SMIC 등과 같은 아시아 지역에 집중되면서 미국 기업들은 반도체 수급난에 시달리고 있다.
◇ 당근일까 채찍일까 '알쏭달쏭'
이 같은 반도체 산업 통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에 화살로 돌아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백악관이 외국 기업을 상대로 미국에서 생산을 많이 하고 일자리도 만들라는 압박을 넣거나, 미국 기업에 혜택을 몰아주는 방식을 동원해 간접적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텔이 수혜를 입을 수 있는 대표적 회사다. 인텔은 지난달 200억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 2개를 추가로 짓고 파운드리에 본격 진출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과정에 미국 정부가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백악관은 7일 열린 언론 브리핑에선 12일 회의에 어떤 내용을 제시할지도 사실상 예고했다. 당근과 채찍이다. 미국 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 세금으로 요약된다. 이 브리핑에 참석한 지나 레이몬도 상무장관은 "반도체는 미국 미래 경제의 토대가 되는 것임은 우리 모두가 안다"며 "반도체의 국내 생산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국내 생산망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데이터와 함께 모든 산업이 급변하는 과정에 반도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이런 핵심 산업에 투자하면 다양한 분야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기여한다는 이유에서다.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발표한 '미국 일자리 계획'(The American Jobs Plan)에 포함된 반도체 분야 투자도 언급됐다. 레이몬도 장관은 "반도체 생산과 개발 지원에 500억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55조원이 넘는 규모다. 재원 마련을 위해 트럼프 정부 때 21%로 인하한 법인세율을 28%로 올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레이몬도 장관은 법인세 인상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기업 상대의 메시지도 전했다. 그는 '미국을 떠난다고 하거나 대화 거부 등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강한 뉘앙스의 발언과 함께 "우리와 함께 자리에 앉아 논의하고 합리적인 방향을 모색하자"고 했다
국내 기업이 백악관의 행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미국은 지난해 6월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 법안'(CHIPS for America Act)을 만들었고, 미국 내부에서도 중국에 대응하려면 한국 같은 동맹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그러니 삼성전자 같은 국내 기업은 미국 정부의 손에 당근이 있는지 채찍이 있는지 예의주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물론 미국 정부의 압박이 당장 큰 변화로 이어지진 않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투자를 확대해달라는 요청을 한다고 반도체 공장이 뚝딱 나올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라며 "반도체 계약은 보통은 1~2년 전에 단가와 스펙, 물량을 정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도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