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제작사인 CJ ENM과 인터넷TV(IPTV)를 서비스하는 통신 업계 간 사용료 갈등이 확산하고 있다. CJ ENM은 LG유플러스와 모바일TV의 프로그램 사용료를 놓고 끝내 협의에 실패해 방송 송출을 중단했고, 이번엔 KT에 대해 전년 대비 1000%의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콘텐츠의 제값을 받겠다'는 CJ ENM의 요구는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다. 올 들어 5조원 규모의 '통 큰' 투자를 선언한 상황에서 기존의 콘텐츠 시장 관행을 그대로 따랐다가는 자칫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강자' 넷플릭스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CJ ENM은 KT가 운영하는 OTT '시즌(Seezn)'과 실시간 콘텐츠 공급 계약을 위한 협상을 앞두고 있다. 내달 1일 시즌이 독립법인으로 출범한 이후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될 전망이다.
협상 결과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대형 콘텐츠 기업인 CJ ENM은 앞서 LG유플러스와의 협상이 최종 결렬되자 'U+모바일tv'에 채널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송출중단(블랙아웃)'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KT는 LG유플러스와 달리 CJ ENM에 우호적이다. CJ ENM이 요구하는 자료, 즉 프로그램 사용료 산정에 필요한 OTT 유료가입자수 수치 등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CJ ENM이 요구하는 사용료 인상 비율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CJ ENM은 KT에 OTT '시즌' 콘텐츠 사용료를 전년 대비 1000% 올려 달라고 제시했다.
앞서 LG유플러스에는 모바일TV 콘텐츠 사용료를 전년보다 175% 인상해달라고 요구하다 협상이 결렬된 바 있다. 2019년 9%, 지난해 24% 사용료를 인상했던 CJ ENM이 올해 175% 인상을 요구하자 LG유플러스가 수용을 거부한 것이다.
이를 놓고 LG유플러스는 "CJ ENM의 과도한 사용료 인상 요구가 협상 결렬의 원인"이라며 "이용자 불편을 초래한 책임은 CJ ENM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CJ ENM은 이러한 요구가 과도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지금의 콘텐츠 시장 구조가 잘못되었으며 콘텐츠 사용료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매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그동안 LG유플러스와 KT 모두 IPTV 사용료만 계약하고, 두 회사의 OTT에 대해선 별도로 콘텐츠 사용료 계약을 하지 않았다"며 "사실상 무료에 가깝게 콘텐츠를 사용했으므로 이번에 제시한 인상률은 높아 보이지만 금액으로 따지면 미미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제작비 5조 쏟아도 IPTV 수신료는 턱없어
CJ ENM의 콘텐츠 사용료 분쟁은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IPTV 업체들이 별도로 제공하는 OTT와 모바일TV 플랫폼에 대한 콘텐츠 인상 요구는 물론 IPTV 콘텐츠 사용료도 올려달라는 입장이다.
CJ ENM은 KT와 LG유플러스를 비롯해 SK텔레콤의 IPTV 서비스 계열사인 SK브로드밴드와 콘텐츠 사용료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통신 3사 모두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CJ ENM은 이들 3개 회사와 IPTV 콘텐츠 사용료를 놓고 매년 재계약을 맺는데 올해에는 전년 대비 25% 인상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IPTV 업계는 '과도한 요구'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CJ ENM은 송출 중단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콘텐츠에 대한 '제값 받기'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그동안 IPTV 업계에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해부터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CJ ENM의 공격적인 행보는 작년 말 정기임원 인사에서 강호성 대표가 수장으로 선임된 이후 본격화됐다. 강 대표는 향후 5년간 5조원의 콘텐츠 투자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IPTV 업계에 대해선 '콘텐츠 사용료 지급에 인색하게 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콘텐츠 제작사인 CJ ENM의 달라진 위상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의 방송 환경이 IPTV 같은 콘텐츠 유통 플랫폼보다 제작사의 입김이 더 세지는 구조로 바뀌고 있어 사용료 인상을 놓고 플랫폼과 콘텐츠 제작사간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준호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는 "CJ ENM은 본인들의 포지션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용료 인상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라며 "국내 미디어 시장이 레드오션화되면서 콘텐츠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주려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콘텐츠 대가 산정 기준을 세우지 않는 이상 시장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도 교수는 "협상 과정에서 투명한 자료공개가 안 되어서 블랙아웃 등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며 "국내는 해외처럼 여러 가치를 세분화해 (콘텐츠) 대가 산정을 해본 적이 없어 이런 협상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콘텐츠에 대한 정당한 가치 정립이 되지 않다 보니 사용료를 놓고 엇갈린 주장이 지속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현 고려대학교 교수는 "CJ가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온 건 사실이고 제값 받기 문제 제기가 어제오늘 이뤄진 게 아니다"라며 "국내는 지상파, PP 등 밸류에이션을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는 콘텐츠 프라이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