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에 따라 의료용 수요가 급증한 '니트릴 장갑'의 주원료 'NBL(니트릴 부타디렌 라텍스)' 시장을 놓고 금호석유화학과 LG화학이 전력 투구에 나섰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수요에 대응해 국내외 공장의 대규모 증설에 나서면서 세계 1위 지위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일 기세다.
연 4000억장?…금호·LG '케파 확대 드라이브'
말레이시아 고무장갑제조연합회(MARGMA)에 따르면 니트릴 장갑 수요는 지난해 2064억장에서 연평균 19% 이상 증가해 오는 2024년 4109억장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LG화학은 이를 12조원 규모라고 추산했다. 금호석유화학과 LG화학 등 NBL 부문 글로벌 톱플레이어들은 이런 수요 급증에 빠르게 대응하는 차원에서 공장 증설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포문은 이 분야 세계 1위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금호석화가 먼저 열었다. 지난달 말 이 회사는 24만톤 규모의 NBL 공장 증설을 결정하고 총 256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금호석화는 이미 NBL 7만톤 규모 증설을 진행중이었다. 계획대로 증설이 진행되면 올해 말 금호석화의 NBL 생산능력은 71만톤 규모를 갖추게 된다.
지난달 결정한 투자분까지 더하면 이 회사 NBL 생산량은 오는 2023년 말 95만톤까지 늘어난다. 생산능력 기준 세계 1위 지위를 다질 수준이라는 게 이 회사 측이 내보이는 자신감이다. 금호석화는 수요 상황에 따라 47만톤을 추가 증설하는 방안까지 검토중이다. 이 증설까지 더하면 금호석화는 총 142만톤의 생산능력을 확보한다.
LG화학은 국내 석유화학업계 1위지만 이 분야는 후발주자다. 이 회사는 한국과 중국, 말레이시아에서 공장 증설을 추진해 연 73만톤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추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국내에서 운영 중인 연 17만톤 규모의 여수공장 NBL 생산능력은 28만톤 규모로 확대할 방침이다. 내년 상반기 내 증산 분량을 본격적으로 상업가동하는 게 목표다.
이와 함께 중국 NBL 생산능력도 내년 상반기까지 연간 21만톤 규모로 확대한다. LG화학은 최근 중국 닝보(寧波)시에 있는 융싱(勇興)법인에 연간 10만톤 규모의 NBL 공장을 본격 가동했다.
아울러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화학기업인 페트로나스 케미칼 그룹(PCG)과 설립한 NBL 합작법인에서도 말레이시아 남부 펭게랑 지역에 연간 24만톤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다. 오는 2023년 상반기 양산이 목표다.
LG화학은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국내외 추가적인 증설 투자를 검토해 연간 100만톤 이상의 NBL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한다는 구상이다. 2023년 안에 생산능력이 100만톤을 넘을 경우 금호석화의 지위를 넘볼 수도 있다.
세계 1·3위 'K-NBL'의 경쟁력 배경은
니트릴 장갑은 비닐(PVC)·천연고무(라텍스)와 함께 일회용 장갑 시장을 견인하는 상품이다. 최근 1~2년 사이 코로나 감염을 차단하는 의료 용도로 국내외에서 수요가 급증했다. 또 유명 요리사들이 이를 착용한 모습이 여러 매체로 노출되면서 '셰프용'이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내구성과 내마모성, 인장강도, 색상발현성이 우수하고 휘발성유기화합물(VOC)이 없는 친환경성을 갖춰 천연 라텍스를 대체하며 성장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천연고무 장갑과 달리 피부 단백질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코로나가 종식되더라도 과거보다 위생 의식이 강화된 영향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니트릴 장갑은 병원뿐만 아니라 반도체 공장이나 음식점, 미용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고 일반인들의 이용도 증가하고 있어서다.
주요 사업자들의 증설 계획 발표는 이 같은 수요 급증에 대응하는 성격인 셈이다. NBL 사업을 하는 회사가 그리 많지 않은 점도 사업자들 입장에선 투자에 긍정적이다. 현재 이 분야 생산능력 기준 세계 1위는 금호석유화학이다. 이어서 영국의 신토모(Synthomer), LG화학이 3강을 차지하고 일본 제온, 중국 난텍스가 5위권에 자리하는 과점 시장으로 평가된다. 시장 점유율은 금호석화가 30~35%, LG화학의 경우 10~15% 정도로 추정된다.
금호석화와 LG화학이 이 분야에서 앞서는 까닭은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 전부터 기술 개발에 나서고 꾸준히 투자한 덕으로 풀이된다. 금호석화는 2007년 박찬구 회장의 결단으로 이 분야 연구·개발(R&D)에 1232억원을 투입했다고 한다. 2009년 생산 기술을 독자 개발하고 상업 생산에도 성공했다.
LG화학도 2007년 독자 기술로 NBL 개발에 성공했고 이듬해 여수공장에서 제품 양산을 시작했다. 기술 개발을 거듭해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장갑(3g)'의 타이틀도 갖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과잉공급 우려에, 재활용 못해 환경 걱정도
하지만 니트릴 장갑에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금호석화와 LG화학이 공장 증설에 경쟁적으로 나선 결과로, 공급 과잉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작년과 올해의 경우 코로나 덕에 관련 수요가 급증했고 이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수요가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윤재성 하나금융투자 연구원도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의 장갑공장 증설이 폭발적이기에 장갑 ASP(평균판매단가) 하락 가능성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NBL보다는 장갑공장 증설 속도가 더 가파르기에 원료 사업자들에 가격협상우위가 있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업계 관계자도 "코로나 이후에도 NBL에 대한 수요가 꾸준할 것으로 예상하는 판단에 따라 공장 증설에 나선 것"이라면서도 "기업이 공장을 많이 증설하고 시장도 성장세가 정점을 찍고 난 뒤엔 성장하는 모습의 그래프가 꺾일 수 있어 추가 증설은 시장 상황에 따라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니트릴 장갑은 세계적 화두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거리가 멀다는 점도 부담이다. 의료용으로 일회 사용한 니트릴 장갑은 전부 폐기해야 하고, 따라서 재활용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니트릴 장갑 연 4000억장 시대가 열리면 쓰레기 4000억장이 쏟아지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의료 행위에 사용된 장갑은 감염 우려를 고려하면 재활용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까닭에 친환경성 측면의 고민이 많다"며 "친환경 원료를 쓰는 방향이나 분해가 잘 되는 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