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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퍼스트무버]바다서 얼어버린 라텍스장갑 원료…이젠 'No. 1'

  • 2021.11.23(화) 08:15

코로나 속 금호석유 뜻밖 호실적 주역 'NB라텍스'
늦게 시작했지만 합성고무 기술력으로 '세계 1위'

세계 시장을 공략하려 야심차게 만든 수출 제품이 바다 위에서 꽁꽁 언다면 어떤 느낌일까. 금호석유화학의 주력 제품 '니트릴 부타디렌(NB) 라텍스'가 품은 아픈 과거 얘기다. NB라텍스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 이후 수요가 급증한 니트릴 라텍스 장갑의 원료다.

사업 초기인 2010년, 금호석유는 액체 상태인 NB라텍스 제품을 울산 공장에서 출하해 말레이시아 등 장갑을 만드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운송했다. 그런데 바다 위에서 제품이 꽁꽁 얼어붙는 일이 터졌다.

액체 상태의 제품을 해상운송한 경험이 거의 없었던 탓에 겨울철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해당 제품은 반품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을 기억하는 금호석유의 한 임원은 "곧바로 동절기 운송 방안을 마련해 현재는 이런 문제 없이 공급이 가능한 구조로 만들었지만, 당시만 해도 매우 아찔했다"고 회고했다.

/그래픽=김용민 기자 kym5380@

"기회 보인다"…빠른 시장 진입

초창기 이렇게 황당한 사고를 겪은 금호석유의 NB라텍스는 현재 생산능력 기준 세계 1위다. 이어 영국의 신토모(Synthomer), LG화학이 3강을 차지하고 일본 제온, 중국 난텍스가 5위권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 점유율은 금호석화가 30~35%, LG화학의 경우 10%대로 추정된다.

금호석유는 2007년부터 본격적인 NB라텍스 연구에 돌입해 2008년 첫 제품을 선보였다. 박찬구 회장의 결단으로 이 분야 연구·개발(R&D)에 1232억원을 투입한 결과다.  당시는 NB라텍스 수요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의료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얇은 고무장갑은 2000년대 초만 해도 천연 라텍스로 만든 제품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연 라텍스는 단백질 성분이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한계도 있었다. 실제로 19세기 말 미국에서 최초로 천연 라텍스 장갑을 도입한 존스 홉킨스병원은 백년가량 지난 2008년 천연 라텍스 장갑의 퇴출을 선언했고, 현지의 다른 병원들도 이 무렵부터 석유화학 제품 기반의 라텍스 장갑을 쓰기 시작했다.

금호석유화학은 이런 수요 변화를 빠르게 포착해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 사업 노하우도 '한몫'

금호석유는 후발주자였지만, 시장 반응은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회사 관계자는 "경쟁사보다 약 20% 개선된 물성 안전성을 보였기 때문"이라며 "심지어 제품 출시 이후에는 인장 강도 우수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금호석유화학의 제품이 될 정도가 됐다"고 설명했다.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십년 쌓은 합성고무 제조 기술력이 있었다. 연속식(continuous) 공정이 대표적이다. 이는 연속된 단계별 공정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균일한 물성을 24시간 끊임없이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려면 높은 기술력과 노하우가 요구된다.

반면 다른 대부분의 제조사는 '배치'(batch)식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이는 모든 원료를 한곳에 넣고 중합하는 방법이다. 기술과 비용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분명하다. 회사 관계자는 "각 배치에서 생산된 제품이 균일한 물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공정이 끝난 후 재가동하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는 한계점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제품으로 장갑을 만드는 과정은 금호석유의 사업영역 밖이었다. 하지만 경량화와 인장강도 등 완제품의 완성도는 원료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동남아 장갑 공장에 대한 기술적 지원에도 나섰다. 라텍스 연구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금호석유 양건호 상무는 말레이시아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래픽=유상연 기자 prtsy201@

코로나 만끽한 금호석유…"생산능력 지속 확대"

그동안 쌓은 노하우는 이른바 '물 들어올 때 노젓는' 상황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의료용 니트릴 라텍스 장갑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올해 들어 금호석유는 NB라텍스 덕에 역대 최대 매출액, 영업이익을 분기마다 갈아치웠다. 지난 3분기 금호석유의 영업이익은 6253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3%나 증가했다. NB라텍스 실적만 따로 파악하긴 어렵지만, 이 사업이 포함된 합성고무 부문 영업익은 2225억원으로 전체의 36%에 달한다. 

금호석유는 코로나19 이후에도 과거보다 높아진 위생 습관 속에서 견조한 성장이 예상되는 시장에 대응해 생산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말레이시아 고무장갑제조연합회(MARGMA)에 따르면 니트릴 라텍스 장갑 수요는 지난해 2064억장에서 연평균 19% 이상 증가해 오는 2024년 4109억장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금호석유의 NB라텍스 생산능력은 2016년 20만톤에서 2020년 64만톤으로 증가했는데, 연내 71만톤 수준까지 더 늘릴 방침이다. 또 2023년까지 2560억원을 투자해 95만톤 생산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다만 LG화학 등 경쟁사도 생산능력을 크게 확대할 계획이어서 공급 과잉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회사 관계자는 "라텍스 장갑은 코로나19 이후 수요가 급증해 필수 위생용품으로 자리잡고 있다"며 "업황에 따라 47만톤 추가 증설을 통해 142만톤 체제를 구축하는 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비즈니스워치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산업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을 말합니다. 아이폰의 애플이 대표적입니다. 꼭 전에 없던 것을 완전히 새로 창조하는 기업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후발주자였지만 기술과 전략으로 시장을 압도해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경우도 적잖습니다. 한국 기업 가운데도 꽤 있습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역경을 딛고 퍼스트 무버로 자리잡거나, 또 이를 향해 나아가는 'K-퍼스트무버' 기업 사례를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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