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전자부품 계열사 삼성전기에도 세계 1위 제품이 있다.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이다. 기판은 반도체와 전자부품을 전기적으로 연결하고 기계적으로 지지하는 회로연결용 부품을 말한다. 작은 크기로 강한 성능을 집약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모바일 AP 기판은 그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 분야로 꼽힌다.
삼성전기의 기판 사업은 PC(개인용컴퓨터)·스마트폰 시장의 성장과 성숙기를 경험하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2006년 매출액 1조원을 달성한 데 이어 2012년 2조원을 찍으며 승승장구했지만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 등 부침(浮沈)이 심했다.
그 과정에서 부진한 사업은 과감히 접고, 새 사업에 힘을 주는 선택과 집중이 반복됐다. 집중의 산물인 'BGA(Ball Grid Array)' 제품군은 기술력 고도화 끝에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19년 19%에서 올 상반기 27%까지 상승을 거듭하고 있다.
1위까지 거침없는 성장
삼성전기의 기판 사업은 30년 전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치원 사업장(현재 세종사업장)에서 PC용 다층인쇄회로기판(MLB)을 양산한 게 시작이다.
모바일용 메인기판(HDI)과 BGA 사업화는 1997년부터다. 이때부터 숨 가쁜 성장이 거듭됐다. 1999년에 부산 사업장을 가동하고, 2002년엔 FCBGA(Flip Chip Ball Grid Array) 양산을 시작했다. 이듬해 연성인쇄회로기판(FPCB)도 양산에 돌입한다.
BGA는 모바일 AP, 모바일용 메모리 칩 등에 적용되는 소형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뜻한다. 반도체에서 신호가 오가는 부분을 공(Ball) 모양으로 배열(Array)해 반도체 칩과 기판을 연결했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기존 방식은 와이어와 같은 '선'으로 연결했으나, BGA는 일종의 '면'으로 연결해 더 많은 신호 입출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2004년, 삼성전기는 세계 최초로 두께 130마이크로미터(㎛) 이하의 가장 얇은 반도체 패키지 기판 개발에 성공했다. 2005년 BGA 기판은 매출 기준 세계 1위를 달성했고, 이듬해 매출액은 1조원을 넘었다.
이후로 성장세는 거침없었다. 2010년 중국에 HDI 생산 공장을 가동했고, 당시 스마트폰 대중화 바람을 타면서 급성장했다. 2012년 매출액이 2조원에 달했다. 불과 6년 사이 배로 몸집을 키운 것이다.
경쟁 과열 직면
고난의 시절이 닥치기도 했다. 스마트폰 시장이 점차 성숙하면서 기판과 같은 부품 가격경쟁이 치열해졌다. 수익성도 떨어졌다. 특히 주력 생산기지인 중국 쿤산(昆山) 법인은 2014년 당기순이익 12억원을 마지막으로 순손실을 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2019년 삼성전기는 쿤산 법인(Kunshan Samsung Electro-Mechanics)의 영업정지를 결정했다.
삼성전기 입장에서 기판 부문은 2013년까지만 해도 전체 영업이익 중 35% 정도를 차지하는 캐시카우(현금 창출원)였다. 하지만 2014년부터 부진을 거듭하는 사업이 됐다.
적자는 쌓였다. 기판 사업의 영업손실은 2015년 829억원, 2016년 1349억원, 2017년 698억원, 2018년 1879억원으로 5년 누적 적자가 4766억원에 달했다. 결국 2019년에 패널레벨패키징(PLP) 사업을 매각하고 HDI 사업에서도 철수하는 구조조정 초강수를 뒀다. 그 해 영업이익 146억원의 흑자를 겨우 기록했다.
아직도 선택과 집중은 이어지고 있다. 올해도 베트남 법인에서 경연성인쇄회로기판(RFPCB) 생산을 중단하는 조치를 했다. 베트남법인은 유일한 인쇄회로기판 해외생산기지였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시장 성장
기판 사업 매출액 감소는 2016년까지였다. 2015년에 가동을 시작한 베트남 법인이 역량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회복했다. 지난해 기판 부문의 매출액은 1조7000억원 수준으로 회복됐다. 3분기 현재 기판 사업이 삼성전기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 수준이다.
특히 삼성전기가 추정한 올 상반기 BGA 시장 매출 기준 점유율은 27%에 달한다. 다만 현재 BGA 시장 점유율은 제품들이 다양화하면서 조사기관이나 업체별로 제품군에 포함하는 제품 등에 대한 기준이 달라 정확한 1위를 가리기는 어렵다. 삼성전기는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 부문에서 1위라고 설명한다.
삼성전기 기판 사업의 이 같은 회복은 전방 산업의 성장 덕이기도 하다. 5세대(5G) 이동통신과 서버, 인공지능(AI), 자율주행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기판이 활용되면서다. 무엇보다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과 함께 비대면 관련 정보통신기술(ICT) 제품에 쓰이는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다.
차별화 역량으로 '승부'
이 같은 시장 변화 속에서 삼성전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간 쌓은 기술력에 있다는 평가다. 반도체의 고성능화로 미세회로 구현과 층간 미세 정합, 세트 두께를 줄이기 위한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고다층, 미세회로, 부품내장 등 차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적극 대응해 패키지기판 시장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며 "앞으로 서버·데이터센터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 등 고부가 제품 영역을 확대해 사업 경쟁력을 성장시키겠다"고 말했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 시장 수요는 지속적인 증가세가 예상돼 삼성전기의 추가 성장도 기대된다. 오창열 삼성전기 기판개발팀장(상무)는 최근 채용 설명회에서 "서버·네트워크·안테나 등 고부가 제품 수요가 증가하면서 고객 물량 요청도 늘고 있다"며 "기판 시장은 올해 86억달러(10조1000억원)에서 2026년 157억달러(18조5000억원)로 연평균 13.1% 성장이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산업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을 말합니다. 아이폰의 애플이 대표적입니다. 꼭 전에 없던 것을 완전히 새로 창조하는 기업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후발주자였지만 기술과 전략으로 시장을 압도해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경우도 적잖습니다. 한국 기업 가운데도 꽤 있습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역경을 딛고 퍼스트 무버로 자리 잡거나, 또 이를 향해 나아가는 'K-퍼스트무버' 기업 사례를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