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에서 동물용 의약품을 제조할 수 없도록 했던 규제가 조만간 완화될 전망입니다. 국무조정실 소속 규제심판부는 최근 유관 부처에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에서 동물용 의약품도 제조할 수 있도록 권고했는데요. 제약사들은 크게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에서 동물용 의약품 제조를 허용하기 위한 규제 완화 논의는 지난 2017~2018년에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관 부처가 제각각이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무산됐죠. 의약품은 기본적으로 약사법에 따라 관리되는데 동물용 의약품 관련 취급 규칙은 농림축산식품부, 인체용 의약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 소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우려됐던 문제는 축산업계가 입을 피해였습니다. 정부에 따르면 국내 동물용 의약품 시장 규모는 지난 2021년 기준 9229억원이었는데요. 이 중 축산용 의약품이 7691억원으로 전체 시장의 83.3%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인체용 의약품을 제조하는 제약사들이 동물용 의약품까지 제조할 수 있게 되면 기존에 동물용 의약품을 전문으로 제조해 온 중소기업들이 타격을 입을 수 있어 축산업계 반발이 컸습니다.
이에 정부는 농축산용 의약품을 제외한 반려동물(개, 고양이, 토끼, 페럿, 햄스터, 기니피그 등 6종) 의약품에 한 해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에서 만들 수 있도록 허용키로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규제 완화가 이뤄질 경우 기존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에서 생산할 수 있는 동물용 의약품은 인체용으로 제조품목허가를 받았지만 동물용으로는 허가받지 않은 성분이어야 합니다. 즉 인체용 의약품과 동일한 성분의 동물용 의약품에 한해 제조할 수 있습니다.
또 인체용·동물용으로 모두 허가받은 성분 121개 중에서는 기존 업계에 대한 영향이 크지 않은 22개 성분에 대해서만 제조가 허용됩니다. 22개 성분은 △과산화벤조일 △네오마이신 △네오스티그민 △라미프릴 △리도카인 △말레인산에날라프릴 △메데토미딘 △메벤다졸 △메트로니다졸 △아미노필린 △아트로핀 △에스트라디올 △염산테르비나핀 △이소플루란 △이트라코나졸 △인슐린 △텔미살탄 △프레드니솔론 △헤파린 △페니실린지나트륨-클레미졸+디하이드로스트렙토마이신 △페니실린지프로카인+페니실린지나트륨 △세파졸린 등입니다.
정부가 규제를 푼 까닭은 국내 제약사들이 줄지어 이미 동물용 의약품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한양행, 대웅제약, 동국제약, 동화약품, 삼진제약, HLB(에이치엘비) 등 다수 제약바이오 기업이 동물용 건강기능식품을 출시하거나 동물용 의약품 개발을 통해 반려동물 관련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데요.
제약사들은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추가로 들여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과 별개로 동물용 의약품 제조시설을 지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해외에 동물용 의약품 수출 기회가 있어도 추가로 제조시설을 지어야 하는 비용 부담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요. 하지만 앞으로는 기존 인체용 의약품 제조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 반려동물 의약품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전세계 동물 의약품 시장은 지난 2019년 229억7306만달러(30조3000억원)에서 연평균 4.6% 성장해 오는 2027년에는 296억9819만달러(39조2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 중 전 세계 반려동물용 의약품 시장은 2019년 88억7652만 달러(11조6000억원)에서 오는 2024년에는 111억7436만 달러(14조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문가들은 인체용 의약품 제조기업들이 동물용 의약품을 제조하게 되더라도 기존 동물용 의약품 제조 기업들이 입을 피해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내 반려동물 의약품 시장 규모는 2021년 1538억원으로 전체 동물용 의약품 시장의 16.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제조한 반려동물 의약품 시장 규모는 402억원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합니다. 국내 반려동물 의약품 시장에서 수입 비중은 무려 73.9%에 달합니다.
특히 국산 동물약이 늘어나면 비싼 가격에 수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수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 의약품 가격도 점차 낮아질 수 있고요. 반려동물에 대한 의료비 절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죠.
서정민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총괄팀 PL은 "이번 동물용 의약품 제조 규제 완화로 내수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보다 글로벌 시장 진출 및 확대로 얻을 경제적 이익이 훨씬 클 것"이라면서 "수입 의존도가 컸던 반려동물 의약품의 자급률이 증가하면 수입약과 경쟁이 심화해 결과적으로 비싼 반려동물 의약품의 가격도 낮아지는 효과도 가져올 것"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