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글로벌 시장에서 앞서가고 있는 HBM(고대역폭메모리)에 더욱 힘을 주며 적자 탈출에 속도를 낸다. AI(인공지능) 시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HBM을 중심으로 조직개편도 마쳤다. 현재 글로벌 HBM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만큼 새 수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해 1위를 지켜내고, 흑자 전환 시기를 앞당긴다는 구상이다.
리더 세대교체 '곽노정-김주선'
지난 7일 진행된 SK하이닉스의 조직개편과 임원인사에서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박 부회장이 내년 3월 정기주총에서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으면, SK하이닉스는 곽노정 단독 대표 체제가 된다. 박정호 부회장은 대표이사에서 용퇴하지만 부회장직을 유지하며 미래 성장동력 마련에 주력할 예정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AI 얼라이언스(Alliance)를 이끄는 등 AI 인프라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지속한다.
이번 조직개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AI 인프라' 조직 신설이다. 미래 AI 인프라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AI 인프라 조직을 신설한 것이다. AI 인프라 담당에는 김주선 GSM 담당이 사장으로 승진해 선임됐다. 이에 따라 기존 박정호 부회장-곽노정 사장 중심이었던 리더 라인업이 곽노정-김주선 사장으로 세대 교체됐다. 곽 사장이 전체 사업을 총괄하고 김 사장이 주요 사업인 HBM을 키우는 구조다.
AI 인프라 조직 산하에는 지금까지 부문별로 흩어져 있던 HBM 관련 역량과 기능을 결집한 'HBM Business(비즈니스)'도 신설했고, 기존 'GSM(Global Sales & Marketing)' 조직도 함께 편제된다. 차세대 HBM 등 AI 시대 기술 발전에 따라 파생되는 새로운 시장을 발굴, 개척하는 'AI&Next(넥스트)' 조직도 신설됐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올해 도전적인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다운턴 위기를 이겨내면서 HBM을 중심으로 AI 메모리를 선도하는 기술 경쟁력을 시장에서 확고하게 인정받았다"며 "이런 흐름에 맞춰 이번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통해 회사의 AI 기술 경쟁력을 한층 공고히 하는 한편, 고객 요구와 기술 트렌드에 부합하는 혁신을 선도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효자 'HBM'
SK하이닉스가 HBM을 중심으로 개편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HBM을 비롯한 AI 반도체에서 성과를 내며 지난해부터 지속된 반도체 한파를 이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적자로 돌아선 이후 4개 분기 연속 적자 상태다. 4개 분기 누적 적자만 9조9748억원이다. 다만 올 1분기 3조402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해 바닥을 찍은 후 적자 규모는 점차 줄어드는 양상이다.
올 3분기 역시 1조792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지만, HBM 등 고성능 메모리 제품을 중심으로 시장 수요가 증가하며 D램은 흑자로 돌아섰다. 박명수 SK하이닉스 D램 마케팅 담당은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전화회의)에서 "전체 시장에서는 컴퓨팅 분야의 DDR5 크로스오버(전환점)를 내년 상반기로 예상하지만, SK하이닉스는 3분기 이미 크로스오버를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다.
향후 시장 전망도 밝다. 이미 내년 HBM3 생산 물량이 모두 매진될 정도로 수요가 몰리고 있어서다. 박 담당은 "HBM3와 HBM3E 포함해 내년 CAPA(생산능력)이 현시점에서 솔드아웃(주문완료)됐고, 고객들의 추가 수요 논의도 들어오고 있다"며 "고객이나 시장 관계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사의 HBM3E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내년 SK하이닉스는 곽 사장의 지휘 아래 스페셜티 제품을 강화하는데 주력할 전망이다. 곽 사장은 "이번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통해 고객별로 차별화된 스페셜티 메모리 역량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이끌어가는 AI 인프라 핵심 기업으로 진화, 발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고려대학교 특별강연에서도 "메모리 반도체 고객이 필요에 부합한 사양의 메모리를 요구하면서 메모리는 범용제품이 아닌 고객별 차별화된 기술로 진화할 것"이라며 "SK하이닉스는 차별화된 스페셜티 제품인 '시그니처 메모리'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고부가 메모리 비중이 증가하며 흑자 전환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는 북미 GPU 및 클라우드(CSP) 업체로의 신규 고객사 확보가 추정되고 HBM과 RDIMM(고용량서버메모리모듈) 등 고부가 스페셜티 메모리 매출 비중이 올해 전년 대비 3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돼 내년부터 2025년까지 실적 상향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특히 "고부가 메모리의 독점 공급구조 확보 및 1b nm(나노미터) 생산성 향상으로 HBM과 RDIMM 판가(ASP)는 경쟁사 대비 두 자릿수 이상의 프리미엄을 당분간 유지할 것"이라며 "범용 메모리 대비 판가가 최소 5배 이상 높아 영업이익률 개선의 주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라고 부연했다.
'실적 부진' 솔리다임 어쩌나
다만 실적 개선을 위해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D램 대비 시황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는 낸드 사업의 정상화다. D램의 경우 AI 호황으로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낸드는 AI 시장 성장에 따른 수혜가 다소 제한적이다. 특히 SK하이닉스의 경우 인텔에서 인수한 낸드 사업부 솔리다임의 회복이 시급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의 낸드 적자의 상당 부분이 솔리다임의 영향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솔리다임은 지난 3분기 기준 총자산 12조9943억원, 총부채 13조4579억원을 기록해 부채가 자산보다 많은 완전자본잠식 상태다. 3분기까지 누적 손실은 3조6724억원에 달한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낸드 시장 전반이 전례없는 시황 악화를 겪고 있어 솔리다임의 자본잠식은 업황 개선으로 해소 가능한 현상"이라며 "4분기부터 영업적자폭을 점진적으로 줄일 것으로 예상되며 수익성 개선과 시황회복이 동반되면 자본잠식은 점진적으로 축소, 해소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솔리다임을 비롯한 낸드 사업 정상화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황 회복이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만큼, 내년에도 보수적인 낸드 생산 기조는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제품 라인업 최적화를 통해 수익성 개선에 주력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조직개편에서 새롭게 신설된 'N-S Committee(커미티)'의 역할도 중요해질 전망이다. N-S 커미티는 낸드, 솔루션 사업의 컨트롤 타워로, 제품 및 관련 프로젝트의 수익성과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업무를 담당할 예정이다.
박찬동 SK하이닉스 낸드 마케팅 담당은 "솔리다임은 인수 이후 유례없이 낮은 메모리 수요 환경으로 어려운 사업 환경이 지속돼 비용 절감, 본사와의 중복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향후 시황 개선과 맞물려 eSSD 로드맵 최적화와 제품 포트폴리오를 강화해 성장성이 높은 고사양 eSSD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