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서비스를 시작한 엔씨소프트의 온라인PC게임 '리니지'는 22년이 된 지금도 국내 대표 게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출시된 모바일게임 '리니지2M'까지 다시 한번 리니지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리니지가 오랫동안 게이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즐길거리'만 충족하는 게임이 아닌 리니지 세상 속에 사회, 문화, 경제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리니지'라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다양하게 파생이 가능했다. 비즈니스워치는 리니지를 통해 게임 IP와 게임 비즈니스 모델, 리니지 속의 경제 시스템을 분석해봤다. [편집자]
"조용한 시골 서버입니다. 소소하게 즐기실 분은 오세요.", "BJ들이 주가 올리고 간 서버입니다. 시세는 세번째로 비싼듯하고요. '막피'(특별한 이유 없이 아무 캐릭터나 죽이고 돌아다니는 사용자)는 많이 없어요.", "오토(자동사냥 프로그램 이용자), 막피들만 같은 서버로 옮겨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난 26일 엔씨소프트가 모바일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리니지2M'의 캐릭터 서버 이전 이벤트를 예고한 뒤 리니지2M 공식 게시판에 이같은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번 이벤트에 참여하면 자신의 캐릭터와 아이템을 130개 서버 중 원하는 곳으로 이전할 수 있다.
이번 이벤트는 리니지2M이 작년 말 출시 이후 서비스 100일에 다가서면서 서버마다 고유의 특징이 구축되고 있는 점에 변화를 주고 게임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시도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특정 서버에 이른바 막피나 오토와 같은 사용자들이 넘쳐나거나, 집단 간 레벨 차이가 심하게 벌어지는 등 양극화 현상이 발생한다면 게임의 재미가 확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임 자체와 게임 사용자를 위한 서비스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들이 더러 보인다. 리니지와 사용자들이 함께 만들고 있는 가상의 세계가 실제 세상과 상당 부분 닮아 있어서다.
우선, 앞서 언급한 서버 이전은 다른 나라로 이동해 사는 '이민'과 닮았다. 서버마다 아이템 가격이 다르고 사회 구조 역시 다른 점에서 그렇다.
가령 A 서버에서 1000원에 파는 칼은 B 서버에선 1200원, C 서버에 가면 800원에 거래되는 등 서버마다 물가가 다르다. 마치 맥도날드 햄버거 가격이 나라마다 다른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벤트를 둘러싼 사용자들의 아우성은 마치 "인구 규모가 적지만 청정지역인 뉴질랜드로 오세요. 미국은 기회의 땅이지만 총기 사고가 많아요"와 같은 말들과 꽤나 닮았다.
이런 차이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서버를 옮기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도 있으나, 전혀 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처럼 엔씨소프트가 만든 리니지 시리즈는 이 게임사가 기획한 기본적 경제 시스템과 사용자들이 만들어가는 게임 내 사회 구조, 게다가 실제를 상당히 닮은 지점에서 더욱 큰 재미를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A 서버에서 활동하는 사용자들이 무과금으로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성향이 강해 특정 아이템이 많이 등장한다면 해당 아이템 가격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후 플레이와 거래를 통해 새로운 가격을 다시 찾아가게 된다.
이렇게 리니지에는 경제학이 말하는 수요와 공급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아이템 가격과 배분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하루 이틀 정도만 '노가다'로 사냥에 나선 뒤에 단검 같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구조라면, 사용자 입장에서 성취의 쾌감도 줄어들고 게임사 입장에서 '현질'(현금으로 아이템 등을 사는 것) 사용자를 더 많이 받을 수 없게 되므로 적정 수준의 아이템 공급을 유지하고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모든 시민들이 농사만 짓고 자급자족을 한다면 정부가 세금 걷기도 어렵고 기존 시장 경제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게임을 운영하는 엔씨소프트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모습이다.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자유로운 시장 기능에 많은 것을 맡긴다.
게임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같은 시장은 사용자들이 직접 만들어가므로, 게임의 재미는 더욱 커진다. 누가 이미 만든 세상에 갇혀 시스템에 순종해 사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가는 세상이 더 재미있고 성취감이 높기 마련이다.
수많은 게임 사용자들이 서로 경쟁과 협력을 통해 리니지 내부 경제 시스템에서 한걸음씩 올라서고 실패하는 재미와 고통 역시 남다를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을 언급한 애덤 스미스의 생각을 이렇게 패러디할 수도 있다.
리니지2M 사용자가 적절한 가격에 구한 단검을 들고 넓은 들판을 활보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를 비롯한 리니지2M 운영진이나 다른 사용자들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심 덕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개입
이렇게 게임은 각각의 주체들이 가진 이해관계가 경쟁하고 타협을 찾으면서 재미를 향해 나아간다.
엔씨소프트는 게임에 활력을 불어넣고 매출도 올리기 위해 수시로 '업데이트'를 하는데, 여기에도 이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업데이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할 때 기존 아이템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되, 신구(新舊)의 조화를 게임 생태계에 맡기는 것이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새로운 아이템을 등장시키더라도 실제 게임 상황에서 전투상 효용 등을 고려해 추가한다"며 "특히 신규 아이템 투입 여부에 따라 기존 아이템의 가치가 훼손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존 아이템의 특성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기존 아이템의 특성을 조정하는 등 인위적인 방식은 마치 실제 사회에서 화폐 가치를 갑자기 조정하는 것과 유사해 집단 반발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리니지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아이템 가치의 디플레이션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것은 아니다. 소모성 아이템을 투입하는 등의 방식도 동원되기 때문이다. 게임 사용자들이 일종의 노가다로 얻은 아이템을 모으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시장에 활력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경제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경기침체 시기에 양적완화 등의 방식으로 돈을 쓰게 만드는 경제 정책의 방향성과 닮았다.
실제로 리니지는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공성전' 콘텐츠를 통해 아이템을 소진토록 한다. 부정적으로 보면 엔씨가 돈을 벌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경제 구조를 고려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지하경제'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엔씨소프트는 모바일 버전 리니지 시리즈의 경우 게임 내부 거래소를 통해서만 아이템 거래를 지원하지만, 사용자들 사이의 사적 거래도 존재한다.
다양한 편법도 동원된다. 아이템베이와 같은 외부 거래소 시스템에서 거래를 마치고는 리니지 공식 거래소에서 특정 아이템을 비상식적인 가격에 매매함으로써 거래를 마무리하는 방식도 있다고 한다. 아이템 거래의 투명성을 훼손하고 시세에도 영향을 미치며 사기 등의 문제 발생 가능성도 높다.
주식시장에서 말하는 '통정거래' 방식과 유사한 셈이다. 이는 매수자와 매도자가 가격을 정해두고 일정 시간에 주식을 거래하는 방식으로, 불법이다. 이지점에 가상 세계인 리니지와 실제 사이에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있다. 아이템 거래 사기를 당하면 경찰서로 가야 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