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는 고성장 단계를 지나 이미 저성장 단계에 진입하였다. 글로벌 공급과잉 상황에 더하여 빈부격차에 따른 유효수요 부족으로 저물가 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시장에서는 저금리시대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채가 많은 가계와 중소기업에게는 저금리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현금성 자산을 많이 보유한 대기업과 이자소득 생활자들은 금리가 양에 차지 않을 것이다.
빈자든 부자든 금리가 낮아도 물가가 안정된다면 돈의 가치는 그대로 보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돈의 가치가 보전되는 시기와 돈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는 시기에 가계, 기업, 정부의 경제활동 방향과 목표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 시대에는 정부의 성장정책, 기업의 사업계획, 그리고 가계의 자산운용 패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소득의 일부분을 소비하고 나머지를 저축하는 흑자주체인 가계는 "평생 열심히 저축한 돈을 노후에 쪼개어 쓴다”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투자하는 적자주체인 기업도 부채 레버리지로 일거에 큰돈을 벌어드리려는 사업계획은 가능한 피해야 한다. 타인자본이 아닌 가능한 자기자본으로 작더라도 확실한 수익이 예상되는 사업에 투자하여야 한다. 정부에서도 성장 목표를 무리하게 책정할 경우 작용보다는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음을 경계하여야 한다.
저금리 상황에서는 경제적 선택에 있어서 위험과 불확실성을 더 크게 고려하여야 한다. 고금리, 고물가 시대에는 돈의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니 빚을 내어 배팅하면 일확천금을 벌게 되고, 설사 실패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부채의 가치가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저금리시대에는 비록 자본비용이 저렴하더라도 타인자본 사용에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만약 부채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면, 시간이 지나도 빚의 가치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빚진 사람이 재기를 꿈꾸는 것은 정말 불가능해진다. 물론 "위험이 클수록 수익도 크다"는 투자의 기본전략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경제가 안정 궤도에 오를수록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적 투자는 실패하기가 쉽고 실패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경제가 고성장기를 지났는데, 금리가 낮다고 해서 투기적 행동이나 고수익 위험 투자를 찾아 나서면 위험이 크게 따르기 마련이다. 고도성장시대에는 여기저기,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있었지만 경제가 성숙기를 지나면서 점차 눈먼 돈도 없어지고 일거에 큰돈을 버는 경로가 점차 없어지고 있다. 단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열에 앞장선 사람들만이 그 대가를 누릴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각건대, 한국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가계부채 누적은, 각 경제주체들이 저성장기조에 들어섰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가계는 일시에 큰돈을 벌어보려고 이리저리 투기적 행동을 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고도성장 타성에 젖어, 억지 소비를 유도하는등 국민경제에 부담을 줬다.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 시대에는 섣불리 일확천금을 벌겠다고 두리번거리기보다 벌이가 작더라도 꾸준히 미래의 소비를 위하여 저축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금리가 낮더라도 「돈의 가치 보전」이라는 장점이 크기 때문이다. 물가가 높은 환경에서 고금리 프리미엄은 물거품과 같다. 고령시대에 국리민복의 길은 당장의 소비보다는 저축 특히 장기저축을 유도하는 길이다. 언젠가는 모두 노인이 될 젊은이들은 손에 커피가 아닌 도시락을 들고 다녀야 옳은지 모른다.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 초기에 고성장, 고물가 상황에서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는 저금리 정책으로 기업에게 특혜를 베풀어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와 반대로 오늘날 저성장, 저물가 시대에 맞지 않는 고금리는 누군가 희생의 대가로 얻는 소위 지대추구(rent seeking) 행태가 될 우려가 있다. 공짜 점심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easynomic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