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음식 중에서 잔칫날 빠지면 허전한 음식이 잡채다. 요즘은 비빔밥, 불고기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외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니 글로벌 푸드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잡채를 좋아하지만 잡채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약 400년 전, 광해군 역시 잡채 맛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광해군 때 한양에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처음에는 사삼각로 권세가 드높더니 / 지금은 잡채상서 세력을 당할 자가 없다"
배경을 설명하면 사삼각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전공을 세웠지만 광해군 집권 후 더덕(沙蔘)요리를 바쳐 임금의 사랑을 구했을 정도로 권력에 집착한 좌의정 한효순을 비꼬는 노래다. 잡채상서는 잡채를 만들어 지금의 장관벼슬인 호조판서에까지 오른 이충을 조롱하며 비웃은 것이다.
이충의 집에서 만들었다는 잡채 맛이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광해군일기에는 "이충이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 바치곤 했는데 아침, 저녁으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올리니, 임금이 반드시 이충이 올리는 반찬이 도착한 후에야 수라를 들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또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했으니 그 맛이 희한하였다"는 내용도 보이는데 이충이 총애를 얻게 된 비결이 바로 잡채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은 이렇게 아첨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역사를 보면 음식 때문에 출세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중국 한나라 때는 양고기를 잘 구워 제후가 된 인물이 있고 당나라 때는 달콤한 참외를 바쳐 벼슬을 한 사람도 있다.
세상 이치가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요리 역시 나쁘게 쓰이면 뇌물이 되고, 패가망신의 원인이 되지만 잘만 활용하면 더할 나위없는 외교의 수단이며, 비즈니스의 도구가 될 수 있으니 광해군 때의 잡채가 살아있는 증거다.
잡채와 관련해 또 다른 의외의 사실이 있다. 광해군이 반했다는 옛날 잡채는 지금의 잡채와는 맛이나 재료가 모두 달랐다. 이때의 잡채에는 당면도 들어가지 않고 고기도 넣지 않았다. 도라지, 오이, 숙주, 무 등 각종 나물을 익혀서 무친 요리라고 했으니 일종의 모듬 나물비빔 비슷한 것 같은데 광해군 무렵의 문집인 『잠와유고』에는 여기에 식초를 가미해 먹는다고 했다.
사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잡채는 지금과 차이가 많았다. 1924년에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칼라 요리책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잡채는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석이버섯 등 각종 채소와 쇠고기, 돼지고기를 넣고 만드는데 여기에다 해삼, 전복을 불려 채쳐 넣으면 더욱 좋다고 했다. 특이한 것은 잡채에 당면을 넣으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요즘처럼 당면을 넣어 만드는 잡채는 고급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먹는 잡채지만 이렇게 음식 하나에도 꽤 복잡한 진화의 흔적이 담겨있다.
그러고 보면 새삼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다. 약 90년 전까지만 해도 고급음식으로 쳐주지 않았던 당면으로 만든 잡채가 지금은 한국인, 나아가 외국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는데 예전 광해군이 먹었다는 잡채는 도대체 어떤 맛이었을까? 잡채를 만들어 바친 이충에게 판서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잡채가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수라를 들었을 정도라는 잡채 맛의 정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