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국민적 관심사다. 예로부터 그랬다. "세상에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죽음과 세금 빼고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세금은 그만큼 확실하고 무섭다. 세금이란 단어 자체가 휘발성과 인화성이 높다. 여기에 폭탄이라는 단어가 가세하면 세인의 관심과 폭발력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내놓은 뒤 '세금폭탄'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장외에서 촛불이 더 타오르길 기대하는 야당은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나오자마자 세금폭탄 카드를 꺼내들었다. 국정원 국정조사 문제를 놓고 여당과 다투다 거리로 나앉은 상황에서 민심에 어필할 수 있는 정치적 호재를 만난 셈이다.
여당이라고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이번 주말 서울 도심에서 얼마나 많은 촛불이 켜지느냐에 따라 여야 샅바싸움의 형세는 확 달라질 수 있다. 새누리당은 세금폭탄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월급쟁이·중산층의 세부담 증가 등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손을 보겠다는 입장이다.
청와대도 나섰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의 세제개편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열되니 그냥 손놓고 있기는 어렵다. 해명의 요지는 증세도 아니고 세금폭탄도 아니라는 것인데, 세금을 더 털리게 된 월급쟁이와 중산층의 불만을 잠재울 만한 수준은 아닌 듯 하다. 주말에 켜질 촛불의 강도, SNS 등을 중심으로 번지는 원성의 수위와 확산속도 등에 따라 세법개정안은 꽤 많은 손질이 가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다.
◇ 호재 만난 야당..'세금폭탄' 십분 활용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의 첫 해 세법개정안을 민생에 역행하는 조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중산층과 월급쟁이들 호주머니를 털 것이 아니라 고소득자와 대기업에 대해 세금을 더 매겨야 하고, 이런 방향으로 세법개정안을 손보겠다는 것이 민주당의 생각이다.
김한길 대표(사진 왼쪽)는 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가 발표한 세법개정안은 대기업과 부유층은 그대로 놔둔 채 월급쟁이 유리지갑만 털겠다는 것"이라며 "최근 경제민주화 포기선언에 이은 명백한 민생역행"이라고 했다.
전병헌 원내대표(사진 오른쪽)는 "가렴주구식 세제개편안이자, 중산층 서민살상용 세금폭탄"이라며 "박근혜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결국은 세원이 100% 노출되는 직장인과 월급쟁이의 유리지갑을 털겠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비판의 요지는 세제개편안으로 내년부터 세금이 올라가는 직장인 수가 434만명인데 이들은 대부분 서민이고 중산층이라는 것. 샐러리맨의 의료비, 교육비, 보장성 보험료, 연금저축, 퇴직연금 등 특별공제, 인적공제 항목을 축소해서 복지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은 사상누각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예산처 장관을 지낸 장병완 정책위의장은 "과표기준 1억50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에 대해 최고세율 38% 적용하면 중산층에 대한 세금을 늘리지 않아도 된다"며 "대기업 비과세 감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대폭 축소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세법개정안을 심의할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이 여야 동수라는 점을 들어 "민주당 동의없이 세제개편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정부 세법개정안의 원안 통과는 물건너 갔고, 적잖은 땜질이 가해지거나 자칫 누더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장외투쟁중인 민주당에게 세금폭탄 논란은 정치적 호재다. 박용진 대변인은 현안 브리핑에서 중산층에 세금폭탄을 안긴 박근혜 정권의 세제개편안과 전면전을 불사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에게 주말인 10일로 예정된 2차 국민보고대회와 이어 개최되는 시민단체 주도의 촛불집회는 중요한 이벤트다. 투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박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어겼고, 청와대는 서민을 버렸지만 민주당은 중산층과 월급쟁이들을 지켜 나가겠다"고 했다. 세금폭탄 카드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민주당은 잘 알고 있다.
◇ 곤혹스런 여당 '폭탄 아니지만..손볼 건 보겠다'
여당은 이런 공세가 불편하다.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국민의 원성을 살 수 있는, 바꿔 말해 장외투쟁중인 야당에 동력을 보태줄 요인은 가급적 차단·제거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세금폭탄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는 부분은 입법과정에서 충분히 수정·보완하겠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입장이다.
최경환 원내대표(사진 오른쪽)는 9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발표된 이후 세금 부담 증가에 대한 중산층, 봉급 생활자들의 우려가 높은 것으로 안다"며 "유리지갑인 샐러리맨들, 중간 소득계층에 대한 부담이 증가한다면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소득자들의 세 부담을 소득 구간, 가구별로 분석해 한꺼번에 과도한 세부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세제개편안에 대한 심의 과정에서 국민들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겠다는 계획이다.
정책조정위원회 부의장인 나성린 의원(사진 왼쪽)은 세금폭탄은 잘못된 비판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중산층의 세 부담이 일부 늘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당정협의 과정에서 중산층 세부담 증가를 최소화했다"며 "그 결과 중산층의 경우 한달 평균 1만원이 늘어난다. 세금 폭탄이 아니다"고 말했다.
중산층을 어느 소득 수준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 의원 계산대로라면 중산층은 1년에 평균 12만원 정도의 세금만 더 내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계산과 비교해도 세부담을 적게 잡은 것이다.
세법개정안 발표후 언론에서 총 급여 4000만원~1억5000만원 근로소득자 351만명의 1인당 세부담이 평균 40만원 증가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기획재정부는 해명자료를 냈다. 자료에 따르면 세법개정안의 소득세 개편에 따른 근로자 1인당 세부담 증가액은 전체 소득세과세자 993만명 기준으로 평균 14만원 수준이다. 총급여 4000만원 이하는 평균적으로 세부담이 감소하고, 7000만원까지는 평균 16만원, 7000만~8000만원은 33만원 정도 세금이 늘어난다.
아마도 나 의원은 세부담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총급여 3450만부터 7000만원 사이 근로자들의 평균 증가액 16만원을 12개월로 나눈 1만 3333원을 1만원이라고 언급한 듯 하다.
나 의원은 "세금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면서도 "국회 심사과정에서 행여라도 중산층 세 부담이 과도하게 증가하지 않도록 따지겠다"고 했다. "어떤 경우에도 자영업자 세 부담 늘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 해명나선 청와대.."감내해달라..읍소드린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사진)은 이날 오전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해명에 나섰다. 세법개정안이 사실상의 증세가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증세라는 것은 새로운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인상하는 것"이라며 "분명히 증세는 아니다"라고 했다.
세금을 내는 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 소득에서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부분이 늘어나는 건 증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의 해명은 원론 수준, 사전적 의미에 치우친 느낌을 준다.
봉급생활자들의 세 부담이 늘어나는 부분에 대해 "일부는 맞다"고 했다. 조 수석은 "세금이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급여 기준으로 3450만~7000만원 사이 근로자들이 추가로 부담하는 게 1년에 16만원, 월로 따지면 1만3000원 정도"라며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그 정도는 어느 정도 감내를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득공제가 줄어든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개라도 다른 설명은 못 드리겠다. 참 죄송스런 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봉급생활자들은 다른 분들보다 여건이 좀 낫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주기를 읍소드린다"고 했다.
조 수석은 "총소득 5500만원 이하의 서민·중산층 가운데 40%는 EITC(근로장려세제) 등의 보조금을 통해 덕을 보기 때문에 하위 계층에서는 오히려 감세 효과가 난다"고도 했다. 이런 설명이 서민들에게 얼마나 먹혀들 지, 세금을 더 내게 된 중산층과 월급쟁이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부안이 국회를 거치면서 손질이 가해지리라는 건 기정사실화 하다시피 했다. 조 수석은 "국회의 심의과정을 거칠텐데 국민의 의견을 담아서 내용이 수정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며 "행정부로서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정기국회 통과시까지 많은 수정·보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